삽질하는 야구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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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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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꼴찌’ 서울대 야구부 이광환 감독

돌멩이에 물웅덩이… 열악한 운동장 사정에 부상 일쑤
“1승보다 학생들 안전이 우선” 무보수로 팀맡아 구슬땀

야구 배트 대신 든 삽이 어색하다. ‘만년 꼴찌’ 서울대 야구부 감독으로 온 이광환 감독이 24일 서울대 야구장에서 삽으로 흙을 퍼 웅덩이를 메우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야구 배트 대신 든 삽이 어색하다. ‘만년 꼴찌’ 서울대 야구부 감독으로 온 이광환 감독이 24일 서울대 야구장에서 삽으로 흙을 퍼 웅덩이를 메우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24일 오전 내내 내린 비로 야구장으로 쓰이는 서울대 보조운동장에는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겼다. 주먹만 한 돌멩이도 굴러다녔다. 등번호 77번. 60대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부진 체격에 야구복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삽질을 시작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흙을 퍼 담아 웅덩이를 덮고 간간이 나오는 돌멩이도 척척 골라낸다. 30여 분 운동장을 몇 차례 휩쓸고 나자 울퉁불퉁한 땅이 제법 야구장의 모습을 갖췄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능숙한 ‘삽질’의 주인공은 5월 서울대 야구부의 사령탑으로 온 이광환 감독(62). 프로야구 OB 베어스(1989∼90년)와 LG 트윈스(1992∼96년, 2003년), 한화 이글스(2001∼2002년), 히어로즈(2008년) 감독을 지낸 베테랑이다. 9월 개강하는 서울대 베이스볼아카데미 초대 원장으로 왔지만 사무실 책상 너머로 열악한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학생들을 보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다치겠다’ 싶더라고. 단단한 야구공이 고르지 못한 맨땅에 맞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이 감독은 당장 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다 다친 사례를 모아봤다. 4년간 53건. 코뼈가 부러지거나 팔다리 골절상을 입는 등 비교적 심각한 부상으로 캠퍼스 상해보험금을 받은 사례만 모은 것이라 실제로 다친 적은 이보다 훨씬 많다. 23일 이 감독은 서울대 야구 동아리 연합인 ‘스누리그’ 소속 28개 야구 동아리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운동하다 너희들 다친다. 야구를 사랑하는 학생들부터 힘을 모아 스크럼을 짜고 제대로 된 야구장 한번 만들어보자.”

이 감독이 무보수로 일하는 서울대 야구부는 만년 꼴찌다. 1977년 야구부가 재창단된 뒤 27년간 1무 199패의 기록을 이어가다 2004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예선에서 신생팀이던 광주 송원대를 상대로 기적적인 첫 승을 거뒀다. 2005년부터는 다시 56연패 중이다. 대회 성적은 만년꼴찌지만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의 인기는 대단하다. 야구 동아리만 28개, 회원은 1000명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학생이 열악한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다 크게 다치기라도 할까봐 이 감독은 삽질에 ‘영업’도 불사했다. 대기업을 쫓아다니며 서울대 보조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깔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 감독의 호소에 야구 동아리 학생들은 보조경기장 시설 개선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감독의 꿈은 서울대 야구부의 1승이 아니다. 9월부터 추계 대학야구 리그가 시작되지만 우승보다는 학생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야구를 했으면 하는 게 소박한 바람이다. “서울대 학생이라고 하면 자기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실력은 좀 떨어지지만 팀플레이인 야구를 하면서 협동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데.” 그의 책상 옆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인조잔디를 그려 넣은 운동장 사진이 붙어 있다. “학생들이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운동장은 꼭 마련해놓고 가야지.”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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