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황태자’ ‘코트의 귀공자’로 불리며 한국 농구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던 우지원(37).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대표’라는 직함을 무척 어색해했다. 11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우지원은 넥타이를 맨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대표 우지원’이라고 새겨진 책상 위의 명패를 몇 번이나 손으로 가리며 수줍어했다.
초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한 우지원은 5월 모비스에서 은퇴했다. 27년간 이름 뒤에 붙어 다니던 ‘선수’가 떨어져 나갔고 그 대신 ‘대표’라는 낯선 직함이 붙었다. “30년 가까이 팀의 훈련 스케줄에 맞춰 지내다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하려니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우지원은 최근 유소년 농구교실 ‘W-gym’을 열었고 4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어바인에도 지점을 내는 등 의욕적인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했다. 평생 운동만 한 그가 직접 사무실도 알아보고 강사 채용, 사업자 등록 등 곧 있을 농구교실 개강을 앞두고 모든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는 “유소년을 가르치는 건 현역 시절부터 마음에 두었던 일”이라고 했다. 모비스에서 뛰는 동안 틈을 내 모교인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생활체육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친 것도 유소년 지도를 위한 준비였다. 은퇴 후 모비스에서 전력분석원 자리를 마련해 줬고, 구단으로부터 유소년 지도를 병행해도 괜찮다는 허락까지 받았지만 그는 전력분석원 자리를 포기했다. “혈액형이 A형이라 그런지 꼼꼼한 편이에요. 아예 안 하면 몰라도 이름만 대충 걸쳐 놓는 건 성격상 안 맞아요.” 둘 다 잘할 자신이 없어 평소 꿈꿔온 농구교실을 택했다는 것이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농구를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10명에서 5명을 뽑는 것과 100명에서 5명을 뽑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한국의 농구 수준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프로농구가 생기기 전 농구대잔치가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연세대에서 뛰었던 그는 말끔한 외모로 여성 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1992년 신인상, 1993년 인기상을 차지했다. 당시 그가 연세대 앞 미용실에 나타나면 종업원이고 손님이고 모두 쳐다보는 통에 영업이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접고 유니폼을 벗는 데 아쉬움은 없었을까. “왜 없었겠어요.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고 체력에도 자신 있어 더 뛰고 싶었죠.” 프로농구 최고령인 LG 이창수(41)가 “나보다 더 오래 뛸 수 있는 선수는 우지원뿐이다”라고 할 만큼 그는 몸 관리를 잘해 왔다.
그는 최소한 마흔까지는 뛰고 싶었다고 한다. “큰딸 서윤(7)이는 아빠가 농구 선수인 걸 아는데 동생 나윤(2)이는 몰라요. 내가 농구 선수라는 걸 둘째가 알게 될 무렵까지는 뛰고 싶었죠.” 우지원이 주장을 맡은 2009∼2010시즌 모비스는 통합우승을 했다. “선수로서는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은퇴 시기를 잘못 택해 쓸쓸히 사라지는 선수를 봤기 때문에 좋은 분위기에서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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