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가 ‘대표’되니 허허벌판 선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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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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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소년 농구교실 곧 개강… ‘제2 인생’ 시작 우지원

“현역시절부터 꿈꿨던 일
강사채용-사업자 등록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최근 은퇴한 농구 스타 우지원이 11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우지원은 은퇴 후 유소년 농구교실을 열었다. 성남=원대연 기자
최근 은퇴한 농구 스타 우지원이 11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우지원은 은퇴 후 유소년 농구교실을 열었다. 성남=원대연 기자
“이건 좀 안 나오게 찍어주세요. 쑥스러워서요.”

‘코트의 황태자’ ‘코트의 귀공자’로 불리며 한국 농구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던 우지원(37).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대표’라는 직함을 무척 어색해했다. 11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우지원은 넥타이를 맨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대표 우지원’이라고 새겨진 책상 위의 명패를 몇 번이나 손으로 가리며 수줍어했다.

초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한 우지원은 5월 모비스에서 은퇴했다. 27년간 이름 뒤에 붙어 다니던 ‘선수’가 떨어져 나갔고 그 대신 ‘대표’라는 낯선 직함이 붙었다. “30년 가까이 팀의 훈련 스케줄에 맞춰 지내다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하려니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우지원은 최근 유소년 농구교실 ‘W-gym’을 열었고 4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어바인에도 지점을 내는 등 의욕적인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했다. 평생 운동만 한 그가 직접 사무실도 알아보고 강사 채용, 사업자 등록 등 곧 있을 농구교실 개강을 앞두고 모든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는 “유소년을 가르치는 건 현역 시절부터 마음에 두었던 일”이라고 했다. 모비스에서 뛰는 동안 틈을 내 모교인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생활체육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친 것도 유소년 지도를 위한 준비였다. 은퇴 후 모비스에서 전력분석원 자리를 마련해 줬고, 구단으로부터 유소년 지도를 병행해도 괜찮다는 허락까지 받았지만 그는 전력분석원 자리를 포기했다. “혈액형이 A형이라 그런지 꼼꼼한 편이에요. 아예 안 하면 몰라도 이름만 대충 걸쳐 놓는 건 성격상 안 맞아요.” 둘 다 잘할 자신이 없어 평소 꿈꿔온 농구교실을 택했다는 것이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농구를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10명에서 5명을 뽑는 것과 100명에서 5명을 뽑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한국의 농구 수준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프로농구가 생기기 전 농구대잔치가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연세대에서 뛰었던 그는 말끔한 외모로 여성 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1992년 신인상, 1993년 인기상을 차지했다. 당시 그가 연세대 앞 미용실에 나타나면 종업원이고 손님이고 모두 쳐다보는 통에 영업이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접고 유니폼을 벗는 데 아쉬움은 없었을까. “왜 없었겠어요.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고 체력에도 자신 있어 더 뛰고 싶었죠.” 프로농구 최고령인 LG 이창수(41)가 “나보다 더 오래 뛸 수 있는 선수는 우지원뿐이다”라고 할 만큼 그는 몸 관리를 잘해 왔다.

그는 최소한 마흔까지는 뛰고 싶었다고 한다. “큰딸 서윤(7)이는 아빠가 농구 선수인 걸 아는데 동생 나윤(2)이는 몰라요. 내가 농구 선수라는 걸 둘째가 알게 될 무렵까지는 뛰고 싶었죠.” 우지원이 주장을 맡은 2009∼2010시즌 모비스는 통합우승을 했다. “선수로서는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은퇴 시기를 잘못 택해 쓸쓸히 사라지는 선수를 봤기 때문에 좋은 분위기에서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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