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고산의 환청, 환각

  • 입력 2009년 10월 11일 21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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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오은선 씨. 동아일보 자료사진
산악인 오은선 씨. 동아일보 자료사진
안나푸르나(8091m) 정상에 도전 중인 오은선 대장(43·블랙야크). 그는 지난해 5월 대원과 셰르파 없이 혼자 로체(8516m)를 올랐다. 정상 등정의 감격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 등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착하게 조심해서 내려가. 긴장 늦추지 말고."

오 대장은 엉겁결에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 몇 걸음 더 옮긴 뒤 빙벽 하강 구간이 나타났다. 그 남자는 다시 "카라비너(등반용 고리)랑 로프 다시 한 번 확인해"라고 말했다. 오 대장은 대답과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단독 등정을 했으니 그와 함께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처음에는 그가 정상을 밟은 뒤 곧 이어 정상에 오른 미국 산악인의 목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미국인은 오 대장보다 먼저 하산에 나섰다. 정체 모를 남자의 목소리는 캠프4에 도착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오 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남자의 조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남자는 하산할 때 지켜야 할 안전 상식을 하나하나 말해줬다.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나서는 산악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 하지만 기진맥진한 상태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다보면 잊어버리기 쉽다. 산악 사고가 하산 도중 자주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 대장은 '유령 가이드'의 친절한 조언 덕분에 무사히 하산했다.

반면 오 대장은 1999년 브로드피크(8047m)를 처음 본 순간 검은 악마가 자신을 덮치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등반 기간 내내 악마의 모습은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극심한 고소 증세에 시달렸고 결국 정상 등정에 실패한 그는 9년이 지난 지난해에야 브로드피크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7000~8000m대의 고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환청 및 환각의 경험이 있다. 환청, 환각은 행운의 조력자로 찾아오는가 하면 어떨 때는 불청객으로 급습하기도 한다. 오 대장은 "정확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고산의 환청, 환각은 사람 내부의 잠재력과 연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나푸르나 등정을 내년 봄으로 미루고 9일 베이스캠프를 떠난 김재수 대장도 이번에 환청을 경험했다. 지난달 25일 눈사태로 조난을 당한 뒤 3일 2차 정상 도전에 나섰던 그는 심한 안개와 강풍으로 정상을 700m 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캠프2(6400m)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는 여자들이 떠드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텐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사태에 이어 유쾌하지 않은 환청까지. 김 대장은 "하늘이 이번은 때가 아니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며 열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 대장과 함께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이제 안나푸르나 원정대는 오은선, 김창호 원정대 두 팀으로 줄었다. 과연 오 대장은 이번에도 환청, 환각을 경험할까. 경험한다면 행운일까, 불운일까. 폭우와 폭설이 휩쓸고 간 안나푸르나는 다시 맑은 하늘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상 부근의 바람은 여전히 강하다.

안나푸르나=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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