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 잡았다 - 金, 빛났다…“대한야구 만세” 이끈 주역 2인

  • 입력 2009년 3월 19일 02시 53분


‘봉중근 의사’ 이치로에 기선제압봉중근(LG·오른쪽)이 18일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일본과의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8강 라운드 1조 승자결승전에서 1회 일본 톱타자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를 상대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투수와 타자의 거리는 18.44m. 샌디에이고=연합뉴스
‘봉중근 의사’ 이치로에 기선제압
봉중근(LG·오른쪽)이 18일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일본과의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8강 라운드 1조 승자결승전에서 1회 일본 톱타자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를 상대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투수와 타자의 거리는 18.44m. 샌디에이고=연합뉴스
“잘했어”김인식 감독이 18일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라운드 1조 승자결승전에서 일본을 꺾은 뒤 손을 들어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김 감독은 1회 WBC 때보다 전력이 약하다는 우려를 씻고 탁월한 용병술로 한국의 2회 연속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샌디에이고=연합뉴스
“잘했어”
김인식 감독이 18일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라운드 1조 승자결승전에서 일본을 꺾은 뒤 손을 들어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김 감독은 1회 WBC 때보다 전력이 약하다는 우려를 씻고 탁월한 용병술로 한국의 2회 연속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샌디에이고=연합뉴스
이치로 3연속 땅볼로 봉쇄

일본전 2승 ‘야구천재’ 부활

‘타격 천재’ 스즈키 이치로(36·시애틀)는 고개를 숙였다.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 라운드 1, 2위 순위결정전에서도, 18일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8강 라운드 승자결승전에서도 한 투수를 상대로 각각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타구는 한 번도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타격 천재’를 농락한 주인공은 ‘잊혀진 천재’ 봉중근(29·LG)이었다.

봉중근이 고교 시절의 명성을 되찾았다. 이번 대회에서 숙적 일본을 상대로만 2승을 거뒀다.

13년 전인 1996년. 그는 고교야구 사상 최강 팀 중 하나로 꼽히는 신일고의 기둥이었다. 1학년 때인 제50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팀이 올린 5승 중 4승을 책임졌고 이듬해 제51회 대회에서는 팀의 4승을 혼자 거두며 신일고의 2연패를 이끌었다.

방망이도 매서웠다. 1997년 광주일고와의 결승에서 솔로홈런을 때리는 등 타율 0.571로 타격 2위에 올랐고 도루상도 받았다. 같은 해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도 투타에서 맹활약했다. 한국은 우승했고 최우수선수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는 그해 겨울 학교를 중퇴하고 메이저리그 애틀랜타와 계약했다.

미국에 진출한 그는 전업 투수가 됐다. 2002년 빅리그 무대를 밟았고 이듬해 불펜 투수로 6승 2패 1세이브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갑자기 볼 스피드가 떨어지면서 평범한 투수가 됐다. 2004년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됐고 2005년에는 어깨 수술까지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고국에 돌아왔다.

지난해까지 LG에서 2년 동안 거둔 성적은 17승 15패에 평균자책 3.65. 팀에서는 에이스 역할을 했지만 빼어난 성적은 아니었다.

봉중근은 2006년 WBC와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때도 태극마크를 달았다. 하지만 WBC 3경기, 올림픽 2경기에 출전해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두 대회 합쳐 11과 3분의 1이닝을 던져 평균자책 6.35. 주연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성적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어도 봉중근은 불평하지 않았다. 올 초 대표팀 최종 명단에 포함됐을 때도 “영광이다.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겠다”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9년 3월. 한국 야구는 ‘돌아온 야구 천재’에게서 역사에 길이 남을 큰 도움을 받았다.

“국가가 없으면 야구도 없다”

믿음-배려로 화합의 리더십

‘국민 사령탑’ 김인식 감독(62·한화)이 또 해냈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 일본을 격파하고 4강 신화를 썼던 그가 ‘Again 2006’을 완성했다.

3년 전 김 감독은 ‘믿음의 야구’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메이저리거가 즐비한 팀들과 경기하는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김 감독은 서둘지도 겁내지도 않았다. 아시아 라운드부터 본선 라운드까지 6연승을 달리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감독은 선수를 믿고 선수는 감독을 믿은 결과였다.

이번에는 그때와 좀 달랐다. 대표팀 감독 선임부터 삐걱거렸다.

소속 팀 성적이 더 중요하다며, 또 건강이 좋지 않다며 대부분 프로 감독들은 대표팀 사령탑을 고사했다. 결국 총대를 멘 사람은 소속팀이 지난해 4강에도 들지 못했고 건강도 가장 좋지 않은 그였다. 무엇보다 의리를 중시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수 선발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1회 대회에서 버팀목이 됐던 이승엽(요미우리)과 박찬호(필라델피아)가 태극마크를 고사했다. 객관적인 전력은 원년 대회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국가가 없으면 야구도 없다”며 선수들의 자긍심을 높여줬다.

“쟤(선수)들한테는 물어보지 마. 다 대답해 줄 테니 나한테만 물어봐.”

김 감독은 미국에 온 뒤 선수들의 개별 인터뷰를 금지시켰다. 젊은 선수들이 쏟아지는 관심에 부담을 느낄까 봐 배려한 것이었다. 대신 본인이 나섰다. 국내와 달리 기자들이 더그아웃에 출입하지 못하자 “대화를 하려면 눈높이를 맞춰야지, 안 그래?”라며 뇌중풍(뇌졸중) 후유증으로 불편한 다리로 서서 얘기를 나눴다. 농담처럼 했지만 취재진에 대한 배려였다.

18일 일본과의 승자전에 김 감독은 추신수(클리블랜드)를 선발 출전시켰다. 소속 구단의 간섭으로 제대로 훈련을 못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어렵게 태극마크를 자청한 추신수에 대한 배려와 믿음 때문이었다.

아시아 라운드를 끝낸 뒤 김 감독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연방 콧물이 흘러내려 늘 손에 휴지를 들고 다녔다. 몸이 불편한 그에게 빡빡한 대회 일정은 지옥의 레이스였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도 그는 해냈다.

샌디에이고=이승건 기자 w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