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복서 삼총사 “주먹 뻗을수록, 세상은 내게 다가왔다”

  • 입력 2008년 11월 21일 08시 55분


남은진·심희정·장은아, 내일 중국 세계복싱선수권 출전

22일부터 29일까지, 중국 닝보에서는 2008세계여자복싱선수권이 열린다. 한국은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선수권에 얼굴을 내민다. 총 13개 체급에 메달이 걸려있지만 한국의 출전선수는 단 3명. 이유는 아직 세계수준과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5명이 출전한 2006세계선수권에서는 전원이 1회전에서 탈락했다.

이번대회의 목표는 1회전 통과. 19일, 서울체고에서 훈련하고 있는 여자복싱대표팀(감독 이종완)을 만났다. 출국 하루 전. 사실 얼마나 맞고 돌아올지 모르지만 국제대회에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박수도, 환호성도 없지만 이들에게는 열정이 맷집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 온 사랑, 복싱

셋 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남은진(17·서인천고)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살 뺀다고 복싱장 문을 두드린 ‘뚱보’ 오빠가 20kg을 감량해 어느덧 자신보다 달리기가 빨라진 것을 알았다. 자존심이 상해 글러브를 끼었다. 우연히 나간 첫 경기에서 RSC승을 거뒀다. 남은진은 “그냥 막 주먹을 뻗었는데 상대가 맞더라”고 했다. 많지 않은 관중이었지만 자신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흠뻑 빠졌다. 그래서 남은진의 별명은 ‘공주.’

심희정(26·대구대)은 다이어트로 복싱을 시작했다. 70kg 가까운 체중 때문에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그녀. 주먹을 뻗을수록 사람들이 다가왔다. 15kg을 감량했을 무렵, 체육관 관장은 그녀의 운동신경을 알아봤다. 정식선수 제의였다. 심희정은 “복싱을 통해 생전 처음으로 주목을 받아봤다”고 했다.

장은아(20·용인대)는 원래 태권도선수였다. 운동이 지겨워져 방황하던 무렵, 생활체육으로 복싱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체육관에 갔다. ‘다시는 운동을 안 한다’고 다짐했건만 끓는 피는 어쩔 수 없었다. 화려한 발놀림에 반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열렬한 후원자다. 경기장을 찾는 다른 부모는 딸자식이 맞으면 얼굴을 감싸지만 장은아의 어머니는 “빠지면서 때려야지”라고 소리친다. 사랑이 예고 없이 찾아오듯, 이들의 연인인 복싱도 그랬다.

○여자라서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들의 사랑은 험난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과 복싱의 ‘과격함’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안 사이처럼 상극이었다. 남은진은 “여자가 무슨 복싱이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멍해지고, 울컥했다. 울분을 삭인 주먹으로 샌드백을 더 힘차게 때렸다. “여자라서 못할 것은 없다”고 외치면서.

심희정의 고향은 경북 안동.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복싱’이라는 말도 못 꺼냈다. 대학졸업 후 의료기기 제조회사에 취직한 심희정은 퇴근 후 어김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대회를 앞두고 “며칠 회사를 빠지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복싱을 위해 2007년 8월, 과감하게 회사를 때려치웠다. 현재 그녀는 대구대학교에서 조교생활을 하고 있다. 집에서는 아직도 전공(일본어)에 대한 미련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줄 안다. 기사가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쌍둥이 언니 심희경씨가 한 편이 돼 주기로 했다.

장은아는 가끔 소개팅이 들어올 때면 서럽다. “사진을 보면 내가 아까운 것 같은데 복싱한다고만 하면 그쪽에서 소개팅을 무산시킨다”고 했다. 운동을 못마땅해 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해본 심희정. “언니가 잘 아는데 그런 남자는 아예 안 만나는 게 나아.” 그녀들의 자매애(姉妹愛)다.

○시상대에서 애국가 듣고 싶어요

장은아는 “(주먹이 제대로 들어가면) 찌릿 전기가 온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국제대회에서는 그 맛을 느껴보지 못했다. 2006세계선수권에서는 유럽선수들의 어깨 근육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9월 인도에서 열린 2008아시아선수권에서는 남은진과 장은아가 동메달을 땄다. 2년 만에 놀라운 발전이었다.

장은아의 꿈은 “시상대위에서 애국가를 듣는 것.” 12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에서는 2012런던올림픽에서 여자복싱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 세 선수는 “만약 정식종목이 된다면 꼭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목표는 모두 “금메달”이란다.

“피겨하면 김연아인 것처럼 여자복싱하면 남은진으로 기억되고 싶어요.”(남은진)

“복싱은 초콜릿처럼 달콤해서 계속 먹게 돼요. 2012년이면 제 나이 서른이지만 계속 초콜릿을 먹고 있겠죠?”(심희정)

“사각의 링 위에서면 도망갈 곳이 없어요. 세상일도 마찬가지겠지요. 태권도는 포기했지만 이제는 부딪히기만 할 겁니다.”(장은아)

당장은 세계선수권 1회전 통과가 목표지만 꿈은 컸다. 금기를 넘어봤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씨앗처럼, 그녀들에게서도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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