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원로심판 이규석 “젊을 땐 관중들과도 많이 싸웠지”

  • 입력 2008년 10월 25일 08시 29분


야구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규석이란 이름을 기억한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001년까지 19년 간 프로텍터를 가슴에서 떼지 않았던 심판의 전설. 국내 심판 중 유일하게 2000경기 출장을 돌파한 그는 걸어 다니는 한국프로야구의 ‘법전’이다.잠실구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사무실에서 이규석(61) 씨를 만났다. 이 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옛 후배라도 만난 듯 반기며 격의 없이 말을 놓았다.

-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당시 심판 수는 얼마나 됐습니까?

“팀이 6개였지. 108경기인가 했을 거요. 심판이 9명 있었는데, 그땐 주재심판이란 게 있었어. 인천, 광주, 대전, 부산 같은 곳에 한 명씩 주재하는 심판이지. 이 사람들이 6명. 그러니까 모두 15명이었군.”

- 심판을 하다보면 종종 비애감 같은 것이 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잘 하면 당연한 거고, 실수하면 욕 바가지로 먹고. 심판도 인간인데 다 잘 할 수 있나.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지. 게다가 우린 이기는 거, 지는 거 없잖아. 선수들은 이기는 맛이 있지만. 여러모로 심판은 어려운 거야.”

- 관중들이 야유를 하면 화가 나시죠?

“해태하고 태평양 경기가 있던 날이었어. 내가 3루심이었지. 당시 인천구장이 운동장하고 관중석이 좀 가까운 편이었거든. 그런데 일부 관중이 그냥 막 욕을 해대더라고. 돈을 얼마나 처먹었느니 뭐니.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기 그지없지만 그땐 나도 피가 확 솟았지. 그래서 이걸 했지(그는 직접 감자바위를 먹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랬더니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몰려왔더라고. 그래서 말했어. 관중들은 심판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 권리가 있는 거냐고. 다행히 기사로는 안 나갔지만, 지금 같으면 큰일 날 거야. 인터넷이 좀 무서워? 하하하!”

이규석 씨는 요즘 관중들의 매너가 무척 성숙해졌다고 했다. 심판들이 운동장 나가가기 겁나던 시절이 있었다. 물병은 양반이고 뜨거운 라면그릇, 심지어 주먹만한 돌도 날아왔다. 술 취한 관중이 운동장에 난입하는 것은 뉴스거리도 아니었다. 광분한 팬들에 의해 구단 버스가 불타올랐다. 국민의 울분이 쌓여있던 시절이다 보니 나라에서도 어지간한 것은 은근히 방조하는 분위기였다.

- 심판으로서 자부심이 있으시죠?

“그럼. 우리 자부심은 딱 하나지. 우린 깨끗이 했어. 82년 원년 시즌 들어갈 때 다 같이 모여서 ‘우린 다른 짓 하지 말자’하고 다짐을 한 뒤 시작했지. 사실 난 유혹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다고.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다른 동료들한테는 상당한 유혹이 들어갔었나 봐. 그런데 나한테는 안 왔어. ‘이규석이한테 접근하면 손해본다’라고 했다는 거야. 오히려 편했지.”

- 심판마다 스트라이크존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 같던데요.

“룰에 보면 무릎 위에서 겨드랑이 사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실에서 교과서대로만 할 수는 없지. 난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이 스트라이크’라고 생각 해. 솔직히 선수에 따라서도 존을 조금 달리 적용하기도 하지. 정말 좋은 투수는 타이트하게, 좀 떨어지는 투수는 조금 넓혀주기도 해. 선동열 같은 투수한테 못하는 투수의 존을 적용하면 타자들이 못 쳐. 한 가운데로 던져도 못 치는데 존을 넓혀주면, 그건 시합 못하지. 그런데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는데.”

이씨는 구단과 선수, 팬들에게 모두 신뢰를 받았다. 84년 삼성과 롯데의 한국시리즈 7차전. 6차전까지 3승3패였고 삼성이 페넌트레이스에서 져주기를 하면서 롯데를 선택한 경기라 구단과 팬들의 반응은 엄청 뜨거웠다. 심판장이 이 씨를 불러 “7차전은 네가 나가라”고 했다. 7차전은 마지막 경기인 만큼 책임이 막중하고, 팀장들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끝까지 거부했지. 이제 와서 얘기지만 당시 내부적인 이유도 좀 있었어. 그래서 노골적으로 따져 물었지. ‘왜 내가 나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주면 나가겠다’라고. 말을 안 해주더군. 그래서 또 말했어. ‘내가 제일 잘 보기 때문에 들어가라는 거면 하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혈기에 부린 객기였지.”

결국 7차전은 이 씨가 들어가 깨끗하게 경기를 끝냈다. 나중에 어떤 기자가 이유를 들려주었다. 양 구단이 경기를 앞두고 ‘누가 심판으로 들어오느냐’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 그리고 ‘이규석이라면 좋다’라고 묵시적인 합의를 봤다는 얘기였다.

해태와 빙그레의 91년 한국시리즈 3차전. 빙그레의 선발투수는 송진우, 포수 유승안, 해태 타자는 김종모를 대신한 정회열이었다. 송진우는 8회 투아웃까지 퍼펙트를 이어가고 있었다. 풀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는 공에 이 씨는 ‘볼’을 선언했다. 이 공 하나에 송진우는 흔들렸고, 결국 대기록은 깨졌고 빙그레가 졌다. 빙그레가 이 씨를 원망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시간이 꽤 흐른 뒤 이 씨는 포수였던 유승안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고. 유승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볼 맞습니다.”

“내 자랑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영 그러네. 96년 한국시리즈에서 한 기자가 내 진행에 대해 ‘완벽했다’라고 쓴 일이 있지. 그런데 내가 정말 완벽했던 게임은 내가 본 2000여 게임 중 단 한 경기도 없어. 내가 주심을 본 경기는 다 녹화를 해서 복기를 하지. 미심쩍었다 싶은 판정을 보면 역시 TV가 옳거든. 사람이 기계보다 정확할 순 없지. 나뿐만 아니라 심판들은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해. 그래야 자기 발전이 있어.”

대선배로서 심판지망생들에게 한 마디 남겨 달라고 청하자 이 씨는 정말 딱 한 마디만을 남겼다.

“심판은 철저한 흑백논리자가 되어야 해. 운동장에서뿐만 아니라 평소 일상에서도.”

인터뷰가 끝나고 가까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요즘 뱃살이 나와 고민인 기자에게 “젊은 친구가 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밥 두 공기를 통째로 내밀었다. 밥을 먹으며 과연 이규 석씨는 자신의 20년 심판생활에 대해 어떤 판정을 내릴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스트라이크’를 외칠 때, 그는 단호히 ‘볼’을 선언할지 모르겠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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