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대 끊어진다” 의사 만류 뿌리치고 ‘진통제 투혼’

  • 입력 2008년 8월 23일 03시 12분


딛지도 못하는 발로 태권도에서 한국의 11번째 금메달을 따낸 황경선(앞)의 팔을 문원재 코치가 치켜들고 있다. 8강전 산드라 샤리치와의 경기 때 왼 무릎 인대가 거의 끊어지는 부상을 해 왼쪽 다리를 들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딛지도 못하는 발로 태권도에서 한국의 11번째 금메달을 따낸 황경선(앞)의 팔을 문원재 코치가 치켜들고 있다. 8강전 산드라 샤리치와의 경기 때 왼 무릎 인대가 거의 끊어지는 부상을 해 왼쪽 다리를 들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황경선(오른쪽)이 22일 베이징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열린 태권도 여자 67kg급 결승에서 카린 세르주리(캐나다)의 얼굴을 노려 발차기를 시도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황경선(오른쪽)이 22일 베이징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열린 태권도 여자 67kg급 결승에서 카린 세르주리(캐나다)의 얼굴을 노려 발차기를 시도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태권소녀 황경선 여자 67kg급 금메달

8강전 경기 도중 왼쪽 무릎 안쪽서 ‘뚝’ 하는 소리

“4년전 恨 되풀이 못해” 부상 숨긴채 금빛 발차기

《여기 두 친구가 있다. 둘 다 말수가 적다.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내성적이고 잘 웃는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와 친해졌다는 점도 닮았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67kg급 금메달리스트 황경선과 57kg급 금메달리스트 임수정이다.》

○ 태권도 동기동창의 동병상련

이들은 서울체고 동기동창이다. 체급은 다르지만 고교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임수정은 고교 1년 때인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와 2006년 세계대학선수권, 2007년 방콕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했다.

황경선의 성적표는 화려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고교생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5, 2007년 세계선수권 2연패에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 금메달까지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둘의 운명은 지난해 9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엇갈렸다.

임수정은 1위를 차지했지만 황경선은 2위에 머물렀다. 황경선의 발목을 잡은 것은 글라디 에팡그(프랑스).

황경선은 이듬해 베이징 올림픽에서 에팡그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며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베이징의 여름을 맞았다.

○ 인대 부상을 참고 얻은 금메달

22일 황경선의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67kg급 출발은 순조로웠다. 예선 16강 첫 상대는 아랍에미리트 공주인 셰이카 마이타 알막툼. 아랍에미리트 태권도협회 명예회장 자격으로 와일드카드를 얻어 올림픽에 출전한 알막툼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황경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라운드 황경선이 옆차기로 1점을 얻자 알막툼도 받아치기로 1점을 얻어 1-1 동점을 이뤘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황경선은 2라운드에 왼발 돌려차기로 알막툼의 얼굴을 가격하는 등 3점을 낸 뒤 3라운드에서도 1점을 추가해 5-1로 이겼다.

8강전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황경선은 산드라 샤리치(크로아티아)를 4-1로 꺾었지만 2라운드 때 왼 무릎 안쪽에서 ‘뚝’ 소리가 났다. 왼 무릎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경기 직후 진찰을 받은 결과 무릎 인대가 거의 끊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기에 나서기 어렵다고도 했다. 하지만 황경선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진통제를 맞고 준결승에 나섰다.

준결승 상대는 지난해 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그를 눌렀던 세계 최강 에팡그.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황경선은 태연한 척했다. 고통을 숨긴 채 오히려 왼발로 공격했다.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이를 악물었다.

3라운드까지 1-1 동점. 연장전은 먼저 득점하는 사람의 승리. 황경선은 연장 40초 만에 에팡그의 가슴에 왼발 돌려차기를 날리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황경선은 결승에서 자신(175cm)보다 키가 10cm나 작은 카린 세르주리(캐나다)와 2라운드까지 1-1 접전을 벌였다. 예전 같았으면 긴 다리를 이용해 KO승을 노릴 만도 했다. 하지만 이미 왼 다리는 만신창이였다. 오래전부터 오른 발등 속을 돌아다니던 작은 뼛조각도 말썽이었다. 상대를 공격할 때마다 오른 발등에 통증이 전해졌다.

황경선은 참고 또 참았다. 3라운드 38초를 남기고 아픈 왼발로 뒤차기를 성공시키며 결승점을 올렸다.

종료 버저가 울리자 황경선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우승의 기쁨과 왼 무릎의 고통이 교차했다. 잠시 후 다리를 절며 기자회견장에 나온 황경선은 여전히 아파 보였지만 웃고 있었다.

“매 순간이 힘들었지만 엄마 아빠를 떠올리며 참았어요. 4년 전 동메달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어 기뻐요.”

문원재(한국체대) 코치는 “경선이가 강한 정신력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고통을, 한계를 넘은 투혼의 승리였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황경선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흐뭇한 표정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 임수정이었다.

베이징=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 영상취재 : 사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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