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스타 키워낸 ‘국민축제’ 80년

  • 입력 2007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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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때 키운 꿈이 세계를 제패했다. 박태환이 25일 열린 세계 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남자 400m에서 우승하며 한국 수영사를 다시 썼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2세 때 키운 꿈이 세계를 제패했다. 박태환이 25일 열린 세계 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남자 400m에서 우승하며 한국 수영사를 다시 썼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8일 열린 2007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시간 8분 04초로 우승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준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동아일보 자료 사진
18일 열린 2007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시간 8분 04초로 우승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준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9년 창설 동아수영대회-1931년 탄생 동아마라톤대회

# 1 박태환 경기고 1년때 최우수선수

2001년 4월 24일 부산 사직실내수영장에서 열린 제73회 동아수영대회. 초등부 자유형 남자 100m에 출전한 도성초등학교 12세 소년은 1분 00초 65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엔 자유형 200m에서도 2분 09초 65로 정상에 올랐다.

소년은 3년간의 공백기를 보낸 뒤 대청중학교 3학년 때인 2004년 동아수영대회에서 다시 한번 이름을 알렸다. 자유형 200m(1분 55초 23)와 400m(4분 05초 35)에 출전해 2관왕에 오른 것. 이어 경기고 1학년 때인 2005년 대회에선 200m(1분 50초 41)와 400m(3분 50초 37)에서 연거푸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대회 최우수선수에까지 선정돼 단숨에 국내 수영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2년 후.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모르는 ‘수영 천재’ 박태환(18·경기고 3)은 25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에서 3분 44초 30의 아시아기록을 세우며 아시아 남자 선수로는 최초로 자유형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데 이어 27일에는 자유형 200m 역시 1분 46초 73의 아시아기록으로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박태환은 지난해 말에 열린 2006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선 3관왕(200m, 400m, 1500m)에 올랐다.

# 2 70년대 조오련 80년대 최윤희 발굴

동아수영대회는 1929년 9월 1일 경성제대(서울 종로구 동숭동) 수영장에서 열린 제1회 전 조선수영경기대회가 모태. 1923년 창설한 국내 최초의 여성 종합스포츠대회인 동아정구대회, 1931년 탄생한 동아마라톤대회와 함께 우리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다.

동아수영대회의 창설은 한국 수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회가 열리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영 선수와 관계자가 모두 모였고 그해 8월 조선수영구락부 탄생으로 이어졌다. 조선수영구락부는 조선수상경기협회를 거쳐 1960년 대한수영연맹으로 변신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으로 대회 개최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동아수영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한국 수영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1979년까지 전국남녀학생수상경기대회로 열리다가 1980년부터 동아수영대회로 바뀌었다.

1970년대 조오련(55), 1980년대 최윤희(40) 등이 모두 이 대회를 통해 발굴됐다. 조오련은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와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 남자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연거푸 2관왕에 올라 ‘아시아의 물개’로 불렸다. 최윤희는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여자 배영 100m와 200m에서 2관왕에 올라 ‘아시아의 인어’로 불렸다.

# 3 황영조 이봉주 91년 출전 ‘신예 돌풍’

1991년 3월 17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을 출발해 성남시 운중동을 돌아오는 42.195km 풀코스에서 열린 제62회 동아마라톤대회는 한국 마라톤의 큰 별이 될 두 유망주가 등장해 관심을 모았다. 21세 동갑내기 황영조와 이봉주. 이들은 당대 최고 선수였던 김재룡 이창우와 경쟁했다. 황영조는 풀코스 데뷔 무대였지만 김재룡 이창우에 이어 2시간 12분 35초의 당시로선 놀라운 기록으로 3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두 번째 풀코스 도전에 나선 이봉주는 2시간 16분 56초로 15위에 올랐다.

‘마라톤 천재’ 황영조는 그해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한 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거머쥐며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는 늦깎이였지만 거북이 같은 꾸준함으로 오랫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1993년 열린 제64회 동아마라톤에서도 12위로 저조했지만 그해 12월 호놀룰루 마라톤에서 우승했고 국제마라톤대회로 처음 승격된 1995년 제66회 동아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어 이봉주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고 2001년 세계 최고 권위의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1998년 방콕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2연패도 이뤘다.

황영조는 1996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지만 이봉주는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린다”는 팬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봉주는 18일 열린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으로 불리는 37세의 나이에도 2시간 8분 04초의 개인 세 번째 최고 기록으로 우승해 국민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 4 영웅 손기정 탄생… 한국기록만 10번

1931년 3월 21일 서울 광화문과 영등포를 왕복하는 14.5마일(23.2km) 달리기 대회가 열렸다. 고려육상경기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체육회가 공동 후원한 이 대회가 바로 동아마라톤의 효시인 ‘제1회 마라톤 경주대회’다.

일제강점기 때 마라톤은 조선인의 울분을 달래고 희망을 전해 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동아마라톤이 탄생한 것은 스포츠 본연의 의미도 있겠지만 민족의식 고취란 사명감이 큰 이유였다.

첫 대회에서는 14명의 출전자 중 양정고보의 간판 김은배가 1시간 22분 05초로 우승했다. 1932년 제2회 대회에서는 ‘올림픽 영웅’ 손기정이 등장했다. 신의주에서 온 20세의 신예 손기정은 2위에 올랐고 3회 대회 때는 서울 장안의 건각을 모두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손기정은 이를 밑거름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월계관을 써 한민족의 기세를 세계만방에 떨쳤다.

동아마라톤이 또 한 번의 도약을 하며 한국 마라톤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은 때는 1964년. 이때부터 동아마라톤은 광화문을 출발점으로 경인가도를 달리는 풀코스로 재탄생하며 한국 마라톤을 본격적인 기록 경쟁 시대로 이끌었다.

1927년 마봉옥의 3시간 29분 29초에서 2000년 이봉주의 2시간 7분 20초까지 20명의 건각이 28번 한국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 중 한국기록은 동아마라톤에서만 10번이 나왔다. 특히 풀코스로 전환한 1964년부터는 19번의 한국기록 중 10번이 동아마라톤에서 나온 기록이다.

2004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로 탈바꿈한 동아마라톤은 2만 명이 넘는 마스터스 참가자가 참가해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한국 마라톤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이봉주-박태환, 동아마라톤-수영대회 참가 당시 사진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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