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박치기 한방에 시름 훌훌… ‘소시민의 영웅’ 하늘 링으로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2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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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 씨(왼쪽)의 박치기 앞에서는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레슬러도, 거구의 서양 레슬러도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전성기 시절 김 씨가 박치기를 하려는 순간 상대 선수의 겁먹은 표정에서 당시 그의 박치기가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일 씨(왼쪽)의 박치기 앞에서는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레슬러도, 거구의 서양 레슬러도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전성기 시절 김 씨가 박치기를 하려는 순간 상대 선수의 겁먹은 표정에서 당시 그의 박치기가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가난하고 힘들었던 1960, 70년대.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마을에 하나뿐인 흑백 TV 앞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박치기 한 방이면 내로라하는 일본의 레슬러도, 거구의 서양 선수들도 고꾸라졌다.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우리는 그의 통쾌한 박치기를 보며 시름을 달랬다.

영웅이 떠났다.

‘박치기 왕’ 김일 씨가 26일 결국 눈을 감았다.

김정현(40·회사원) 씨는 “30년 전에 김일 선생이 이마를 물어 뜯기고도 피나는 이마로 박치기해 결국 이기던 장면이 생생히 기억난다”며 “암울했던 시대에 희망을 줬던 분인데 돌아가셨다니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 스포츠전문지 닛칸스포츠는 톱뉴스로 영웅의 별세를 전했다.

○ 김일은 누구?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명사였던 그는 1960, 70년대 최고 인기의 스포츠 스타였다.

1929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섬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힘으로 씨름대회를 휩쓸었다. 16세에 결혼한 뒤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던 그는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프로레슬링 세계 챔피언 역도산의 모습을 보게 된다. ‘피가 솟구치는 듯한 흥분’을 느낀 그는 1956년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다.

불법체류자로 1년간 형무소 신세를 져야 했지만 프로레슬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역도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무수히 보냈고 감동한 역도산은 그의 신원 보증을 서 감옥에서 빼내 주었다.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전설적인 사나이라는 뜻)’라는 일본명으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고인은 끝없는 인내와 노력으로 정상에 올랐다. 고인은 1999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역도산 선생이 골프채나 재떨이로 매일 내 이마를 때렸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포기할 생각도 해봤지만 역도산 선생은 “내가 때리지 않으면 너는 성공할 수 없다”며 자신을 단련시켰다고 했다.

○ 세계 정상, 그러나 불우한 말년

‘필살기’ 박치기를 단련한 고인은 196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세계태그챔피언을 차지했다. 같은 해 역도산이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했지만 고인은 더욱 운동에 전념했다. 이기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고인은 30년간 3000여 차례나 경기를 치르며 20차례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고인은 고향과 조국 사랑이 유별났다.

일화 하나. 고인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고인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했다. 1960년대 말 박 전 대통령은 고인에게 “임자, 소원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제 고향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질 않아서 제 경기를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6개월 뒤 그의 고향은 인근 섬 중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박 전 대통령은 1975년 “한국 사람도 하면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줬다”며 ‘김일체육관’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폭탄선언이 레슬링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뒤 프로레슬링은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김일체육관은 문화체육관으로 바뀌었고 고인은 1982년 아수라 하라와의 경기를 끝으로 목 부상으로 은퇴했다.

이후 그는 사업 실패로 재산을 모두 날렸고 박치기 후유증에 시달리다 1994년부터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도움으로 무료 입원 치료를 받아 왔다. 고인은 갔지만 그는 통쾌했던 박치기와 함께 영원한 영웅이자 전설로 남을 것이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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