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차 vs 유모차’…모두 ‘표준어’인데 논쟁 왜 계속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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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11월 10일 0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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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24 뉴스1
2021.6.24 뉴스1
“아직도 유모차라고 부르세요?”

최근 젊은 남녀 사이에서 자녀 유무를 불문하고 ‘유모차(乳母車) 논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유모차와 유아차 둘 중에 어떤 표현을 사용할 건지 의견이 갈린 건데요. 엄마만 끌어야 한다는 의미가 풍기는 ‘유모차’ 대신, 성평등적인 의미를 담은 ‘유아차’라는 표현을 사용하자는 취지입니다.

발단은 한 유튜브 예능이었습니다. 지난 3일 배우 박보영씨는 유튜브 예능 ‘핑계고’에 출연해 개그맨 유재석씨, 조세호씨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때 박보영씨가 조카와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제가 밀면 (사람들이 저를) 안 봐요”라고 말하자 유재석씨가 “아~ 유모차를 밀면”이라고 답했고, 조세호씨도 “아 그러니까 중심이 유모차로 가니까”라고 받아쳤습니다.

논란이 된 건 자막에 유모차가 유아차로 표기됐기 때문입니다. 출연진들이 여러번 유모차라고 언급했음에도 유아차로 자막 처리되자 일부 시청자들이 “틀린 단어도 아닌데 굳이 유아차로 자막을 바꿀 필요가 있냐”며 지적하고 나선 겁니다.

그렇다면 둘 중 바른 말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답은 ‘둘 다’이긴 합니다.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11월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표준어로 등재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다만 유모차를 유아차나 아기차로 순화한 이력이 있다는 점에서 되도록 유아차나 아기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권장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본래 유모차는 일본어 ‘유바-구루마’(乳母車)에서 넘어온 말로 추정되는데요. 정작 어원이 된 일본에서조차 이제는 유모차라는 말이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일부 고령층을 제외하면 유모차 대신 ‘베이비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일각에서는 애초에 ‘유모(乳母)가 끄는 차’라는 의미가 유모차로 오역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국립국어원도 인정했는데… 끝나지 않는 ‘단어 전쟁’
(‘핑계고’ 유튜브 갈무리)
(‘핑계고’ 유튜브 갈무리)

문제는 ‘유모차 논쟁’이 단순 표현을 넘어 남녀 간의 이념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페미니즘 사상을 가진 여성들이 유아차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는 식의 주장과 성차별적인 표현을 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게시판에는 여전히 유모차, 유아차와 관련된 항의가 빗발치고 있는데요. 일부 남성들은 유아차라는 표현을 두고 “페미(페미니즘) 묻었다”며 분노를 표했습니다. 한 누리꾼은 “유모차가 유아차면 고모도 고아 아닌가”라며 비꼬기도 했습니다.

직장인 전모씨(26·여)는 “유아차라는 표현을 접하고서 굉장히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논쟁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페미니즘을 떠나 자연스레 바뀌어야 하는 표현인데 일부러 트집을 잡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직장인 최모씨(32·남)는 “유모차라고 말한다고 해서 여자만 유모차를 끌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며 “그런 의미로 쓰는 게 아닌데도 꼭 유아차로 바꿔 불러야 하나 싶다”고 했습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갈무리)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갈무리)

◇전문가 “유모차 오히려 남성 차별 표현일수도”

유아차 논쟁은 그간 반복돼 온 일부 집단·성별을 상대로 한 ‘낙인찍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언어가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면서 해당 표현을 빌미로 특정 집단을 검열, 색출해내겠다는 의도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오조오억’ 논란이 그랬습니다. ‘아주 많다’는 뜻의 신조어인 ‘오조오억’은 한때 남성 혐오 단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해당 표현을 사용한 유명인과 기업 등이 줄줄이 남성 혐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조오억’의 유래는 한 아이돌 연습생의 팬이 남긴 댓글로 남성 혐오와는 무관한 걸로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소모적인 갈등이 계속되면서 성평등 표현을 사용하기가 괜스레 꺼려진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남초 회사에 다니고 있는 전씨는 “이렇게 논란이 된 이상 앞으로 회사에서는 유아차라는 말을 쓰기가 조금은 껄끄러워질 것 같다”고 털어놨습니다. 완경(폐경), 출생률(출산율) 등의 표현도 마찬가지로 멈칫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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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이른바 ‘좌표찍기’를 통해 성평등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에 부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며 “성차별 개선 행위를 오히려 남성들에 대한 역차별로 바라보는 편견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이런 논란을 만드는 이들의 진짜 목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힘줘 말했습니다.

페미니즘을 차치하더라도 유모차라는 표현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모차는 과거 여성이 양육을 전담하던 때 관행적으로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에는 전혀 맞지 않는 표현”라며 “남성 육아휴직 논의가 점점 활발해지는 상황을 고려할 때 시대적 흐름에도 역행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또 신 교수는 “(유모차가) 오히려 남성을 양육에서 배제하고, 아버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 차별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며 “페미니즘과 연결 지을 필요 없이 바꿔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습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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