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못지않게 치열했던 1세대 과학기술인들 삶 감동적이에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1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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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과학의 날’, ‘과학입국’의 주인공 고 최형섭 장관의 묘역 가보니…

“‘과학도시’ 대전의 자랑인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조성하신 분입니다. ‘과학입국’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죠…”

과학의 날인 21일 오전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이석봉 대전시 경제과학부시장과 ‘대전의 아들’이란 이름의 시민구단 ‘시티즌’ 서포터즈들이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지금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이석봉 대전시 경제과학부시장(왼쪽)이 시민구단 서포터즈 청년들이 과학의 날인 21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치된 고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 묘욕을 찾았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이석봉 대전시 경제과학부시장(왼쪽)이 시민구단 서포터즈 청년들이 과학의 날인 21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치된 고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 묘욕을 찾았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과학도시 대전의 청년이라면 최 장관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이 부시장이 공동 참배를 제안했다. 과학의 날이고 올해가 대덕특구 조성 50주년이었지만 이날 묘역을 다녀간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금 후에 이장우 대전시장이 ‘대전시민’ 이름으로 보낸 ‘과학의 날’ 축하 화환이 도착했다.

30대 안팎 나이의 서포터즈들은 최 전 장관을 잘 알지 못했다. 최 전 장관을전에 알았느냐는 이 부시장의 질문에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7년 동안 과학기술 행정의 사령탑에서 ‘과학입국(科學立國)’을 진두지휘한 분이에요. 우리나라 최장수 장관이죠. 박 전 대통령이 과학기술의 토대롤 잡아 놓고 나가라며 놓아주지 않았죠. 그리고 대덕특구(당시 대덕연구단지) 조성 임무를 맡겼죠…”

● ‘대덕특구 조성 50주년’ 비화가 여기에…

과학·산업 전문 언론인 출신인 이 부시장은 월남 파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덕특구 탄생 비화를 들려줬다.

“미국은 처음 한국의 월남 국군 파병의 선물로 공과대학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해요. 박 전 대통령은 대신 공업기술연구소를 요구했죠.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급했던 우리로서는 산업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KIST가 만들어졌는데, 여긴 종합연구소이기 때문에 개별 전문분야의 연구소들이 필요했죠. 대덕특구가 조성돼 많은 연구소들이 생긴 배경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 경제의 체질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우리 경제 체질의 심각성을 절감한 것은 한 연구기관장 회의였던 것으로 전한다. 언론인 조갑제 씨의 저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숨은 이야기를 전한다.

1966년 2월 3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에 최형섭 박사를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KIST제공
1966년 2월 3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에 최형섭 박사를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KIST제공
‘박 대통령은 1965년 4월 연구소장들 초청 리셉션에서 ‘우리 기업이 스웨터를 만들어 2000만 달러나 수출했다’며 대견해 했다. 그러나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일본은 이미 매년 10억 달러어치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는데 그런 힘은 기술개발에서 나온다고 말하자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대덕특구는 1973년 11월 30일 연구학원도시로 지정 고시될 당시 야산과 구릉지, 포도 배 복숭아 밭이 전부이던 ‘깡촌’이었다. 그 후 50년, 우주선과 휴대전화, 반도체, 원자력 기술을 견인하는 세계적인 ‘과학기술 메카’로 상전벽해 했다.

참배자들은 최 전 장관의 비문 ‘연구자의 덕목’ 앞에서 숙연해졌다. 연구윤리 논란이 잦아지고 샐러리맨 같은 과학자들이 많아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만 하다는 데 공감했다.

● 연구자 숙연하게 하는 최형섭 장관 비문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이 부시장 일행은 이어 같은 묘역에 있는 고 최순달 전 체신부장관, 고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묘소에도 참배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순국선열 등의 유해가 산과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가운데 과학기술인들이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이들 한국의 1세대 과학기술인들은 과학입국을 위해 독립투사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최순달 전 장관의 묘비에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TDX와 우리별 위성 개발은 …우리 과학기술계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추모글이 적혀 있었다.

고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 묘비글인 ‘연구자의 덕목’.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그는 불모지였던 한국의 항공우주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다.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는 그의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82년 초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시절 이른바 ‘TDX(시분할 전자교환기) 혈서’를 정부에 보낸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연구원 일동은 신명을 바쳐 TDX 개발에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배수진의 각오를 담았다. 그 시절에 천문학적인 액수인 24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받기 위해서는 정부에 확신을 심어줘야만 했다. 3년 만에 TDX 개발에 성공해 교환기 부족에 따른 전화 적체를 말끔히 해소했다. 이로써 한국은 통신 선진국에 진입했다.

● 독립운동 방불했던 1세대 과학자들의 삶

‘원자력계의 대부’로 통하는 한 전 소장은 우리를 원자력 강국으로 이끈 초석을 놓았다. 그의 묘비에는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는 비문이 적혀 있다.

그는 1986년 12월 영광원자력발전소(현 한빛원전) 3, 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를 맡은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로 기술을 배우러 떠나는 원자력연구원 환송식에서 연구원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면서 “한국형 원자로(경수로)는 여러분 손에 달렸다. 실패하면 아예 돌아오지 마라”고 독려를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만세’ 삼창과 함께 떠난 연구원들의 기술 습득으로 우리는 원자력 강국으로 진입했다. 1971년 국방과학연구소 병참물자개발실장 시절에는 한강 백사장에서 자갈 던지기를 통해 국방과학연구소의 ‘한국형 수류탄 개발’ 미션을 수행했다. 개발비를 줄이기 위해 손의 감각이라는 원시적인 방법을 활용했지만 그 결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만큼이나 정확했다고 한다.

묘역을 함께 찾은 젊은 서포터즈들은 현충원에 이런 분들이 모셔져 있고 대덕특구에 이런 비화들이 있는지 잘 몰랐다면서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윤원중 케이에코이노솔 대표(34)는 “과학자들의 헌신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됐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혜택을 받고 자라 사실 그 고마움을 잘 몰랐다”며 “앞으로 오늘 참배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동료들에게 적극 알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승범 세한상사 과장(32)은 “대덕이노폴리스벤처협회에서 인턴 생활을 할 때 대덕특구가 국가와 대전의 발전을 견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며 “오늘 묘역을 참배하면서 잘 몰랐던 이야기까지 알게 돼 더욱 더 마음속에 새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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