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일로 26시간 당직에 꿈꾸던 외과의사 접어”… 커지는 필수의료 공백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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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블랙홀’ 된 의대]〈중〉 생명 살릴 의사가 없다

“위잉, 위이이잉….”

9일 새벽 수도권 A 상급종합병원 내 전공의 당직실. 외과 중환자실 레지던트 2년 차 김아름(가명·31) 씨의 업무용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닥터 노티(notification·병동 간호사의 당직 의사 호출)였다. 전날 밤 긴급 신장이식 수술에 들어간 환자가 중환자실로 오고 있다고 했다. 김 씨는 불 꺼진 당직실을 까치발을 들고 빠져나왔다. 토막잠을 자는 동료들을 깨울까 봐서다. 휴대전화 시계는 0시 45분을 가리켰다. 당직실 침대에 몸을 누인 지 45분 만에 다시 중환자실 호출이다. 그는 격일로 26시간 30분씩 당직을 선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환자를 돌볼 때면 내 생명을 쪼개 환자들에게 나눠 주는 듯한 느낌입니다.” 김 씨는 환자의 생명을 살려내는 외과 집도의(執刀醫)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전공의 생활 2년 만에 꿈을 접기로 했다. 수많은 전공의가 김 씨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수련을 마치기 무섭게 대학병원을 떠난다. ‘덜 힘든 일자리’를 찾거나 동네 의원을 차리기 위해서다.


매년 대학 입시에서 성적 최상위권 학생 3058명이 의대에 간다. 전국 의대 정원 수다. KAIST 등 이공계 인재들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환자의 생사가 오가는 대학병원 필수의료 병동엔 의사가 부족하다. 선천성 심장병, 미숙아 등을 담당하는 소아청소년과를 예로 들면, 올해 전공의 충원율은 25.5%에 불과하다. 동아일보가 6, 7일 전국 의대생 246명을 대상으로 ‘기피하는 전공 세 가지를 꼽아 달라’고 물었더니 소아청소년과와 흉부외과, 산부인과가 1∼3순위에 올랐다. 대표적인 필수의료 과목들이다. 이대로 가면 수년 안에 의사가 없어 수술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소아-흉부-산부인과 기피… “수술 싸고 검사 비싼 건보수가 고쳐야”


소아과 개원의 평균 연봉 1억 최하위
의대생들 격무에 보상 적은 곳 기피
필수의료 과목들 공백 점점 커져
비급여로 돈버는 진료과목으로 몰려


13일 낮 12시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병원. 내과 레지던트 2년 차 정진형 씨(29)는 폐렴으로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70대 림프종 환자에게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하려 애쓰고 있었다. 환자의 기도가 좁아진 탓에 삽관이 쉽지 않았다. 3, 4분이나 지났을까. 환자가 심장마비에 빠졌다.

“코드 블루(Code Blue·심정지 환자 발생). 내과 선생님들 혈액내과 병동으로 와주세요.”

다급한 안내방송이 울리고 병원 곳곳에 있던 전공의(인턴·레지던트)들이 달려왔다. 전공의 10여 명이 심폐소생술(CPR)을 하며 사투를 벌인 끝에 환자의 숨이 돌아왔다. 정 씨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아침도 점심도 걸렀지만 잠이 배보다 더 고팠다. 전날 응급실 당직으로 밤을 꼬박 새운 터였다. 하지만 잠시 쉴 틈은 나지 않았다. 오후 2시 30분. 회진 시간이다. 입원 환자 40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 ‘워라밸’ 찾아 꿈 접는 새내기 의사들
2016년 시행된 전공의특별법에 따르면 전공의의 근무 시간은 주당 80시간으로 제한돼 있다. 하지만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지난달 발표한 2022년 실태조사를 보면 전공의 2명 중 1명(52%)은 주당 근무 시간이 80시간을 초과한다고 응답했다. 이 비율은 흉부외과(100%), 외과(82%), 신경외과(77.4%) 등 필수의료 과목에서 특히 높았고, 피부과(15.2%), 마취통증의학과(22.2%) 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러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격차는 의대생들이 필수의료 전공을 기피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필수의료 과목을 ‘기피 전공’으로 선택한 의대생의 67.1%가 “전문의가 된 후 삶의 질을 기대하기 어려워서”라는 이유를 들었다. “전공의 시절 업무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서”라는 응답도 61.1%에 달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라는 응답은 51.9%였다.

이달 말 서울 소재 의대 졸업을 앞둔 서모 씨(26)도 뇌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겠다던 꿈을 포기했다. 서 씨는 “신경외과 교수님들이 최소 3시간 걸리는 수술을 하루에 4, 5건까지 하더라. 내 체력으론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1년간 인턴 생활을 한 뒤 재활의학과 전공의 자리에 지원할 생각이다. 서 씨는 “재활의학과 전공의들은 병원에서 화장까지 하고 다니더라”라고 했다.
● 기형적 수가체계가 문제
‘워라밸’을 포기하고 필수의료를 전공한다고 해도 미래의 기대소득은 다른 과목보다 오히려 낮다. 본보 설문조사에 따르면 필수의료 과목을 지망하지 않는다고 밝힌 의대생의 과반(52.1%)이 “필수의료 과목에서 가장 먼저 해결돼야 할 문제는 낮은 보상(수가)”이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62.6%는 “업계 평균 수준의 보상이 보장된다면 필수의료 과목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소아청소년과는 의대생들이 가장 선택을 꺼리는 과목이 됐다. 소아청소년과는 2020년 기준 개원의 1명당 연평균 소득이 1억875만 원으로, 업계에서 최하위다. 의사 전체 평균(2억3070만 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합계출산율이 0.7명대로 떨어진 초저출산 추세를 감안하면 미래는 더 어둡다.


박은철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건강보험 수가가 필수의료 분야 진료나 수술에 대해선 낮게, 검사에 대해선 지나치게 높게 책정돼 있다는 점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장비 등 고가 검사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쓴 돈이 수가에 반영되면서 검사 비용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됐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병원은 인건비가 싼 전공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과한 업무를 못 견뎌 필수의료를 떠나는 젊은 의사가 늘어난다. 반면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등 과목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최신 기술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개발돼 과목 간 소득 격차가 점점 벌어진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강남의 성형외과 개원의 중에는 본래 전공이 성형외과가 아닌 외과 등 필수의료 과목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가 숨졌다. 뇌동맥류 결찰술을 받으면 살 수 있었다.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전문의(교수)는 이 병원에 2명뿐인데 안타깝게도 모두 출장 중이었다. 전국에서 이 수술이 가능한 숙련된 의사는 133명뿐이며, 이 중 상당수가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필수의료 체계를 살릴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필수의료 공백#의대#소아청소년과#흉부외과#산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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