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도 ‘읽기의 즐거움’ 누리도록 쉬운 글로 풀어드려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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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학습자’ 콘텐츠 기업 피치마켓
어려운 표현 쉬운 글로 바꿔 제공
유명 문학작품, 일상 속 비문학, 무인편의점 이용법 등 종류 다양
독서 가능해져 학생 간 대화 늘고, 쉬운 글 통해 세상과의 접점 확장

‘느린 학습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 ‘피치마켓’이 제작한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일부(위 사진).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현을 바꾸고 배경 설명을 넣었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에서 피치마켓의 서적을 활용하는 교사들이 모여 수업 성과를 공유하는 행사를 열었다. 피치마켓 제공
‘느린 학습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 ‘피치마켓’이 제작한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일부(위 사진).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현을 바꾸고 배경 설명을 넣었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에서 피치마켓의 서적을 활용하는 교사들이 모여 수업 성과를 공유하는 행사를 열었다. 피치마켓 제공
‘계절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늘에 있는 별을 하나씩 세어 봅니다.’

학창 시절 누구나 배웠을 법한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첫 구절이다. 그런데 어딘가 어색하다. 원작은 이렇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먼저 소개한 구절은 ‘느린 학습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 ‘피치마켓’이 원작을 이해하기 쉽게 고친 것이다. 문해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이나 경계선 지능(IQ 70∼85) 학생들을 위해 어려운 문학적 표현이나 단어를 쉽게 바꿨다. 2015년 피치마켓을 만든 함의영 대표는 “느린 학습자도 글을 읽는 즐거움이나 정보 획득에서 소외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학, 법, 재난 대응 요령까지 ‘쉬운 글’로
피치마켓이 느린 학습자를 위해 발간한 책은 문학 37권을 포함해 단행본 160권에 이른다. ‘메밀꽃 필 무렵’ ‘로미오와 줄리엣’ 등 유명 문학 작품부터 ‘알기 쉬운 노동법’ ‘재난 대응 행동 요령’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비문학 서적까지 다양하다. 2020년 총선 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함께 투표 방법을 다룬 책자도 만들었다.

특수교사들은 학생들이 이런 책들을 접한 뒤 교실에 변화가 생겼다고 전한다. 예전엔 읽을 엄두가 안 나던 책을 함께 읽고 공통 관심사가 생기니 학생들 간에 대화와 교류가 늘었다. 김가영 서울 경복고 교사는 “문학 작품은 스스로 읽어야 교육적 의미가 있는데, 기존 수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해하기 쉽게 쓰인 시나 소설을 읽으면서 학생들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피치마켓은 자체 개발한 콘텐츠를 담은 ‘월간 피치서가’라는 책을 매달 온·오프라인으로 발행한다. 특수학교나 특수학급 교과 과정이 자세히 담지 못하는 소재를 주로 다룬다.

월간 피치서가 36호의 제목은 ‘편의점’이다. 편의점 상품에 흔히 붙어 있는 ‘1+1’ 표시는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고, 택배 보내기 등 편의점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알려줬다. 키오스크(무인 단말기)를 써야 하는 ‘무인 편의점’ 이용법,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의 차이 등 편의점 관련 최신 이슈도 알기 쉽게 설명했다. 경계선 지능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박모 씨(50)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소재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니 아이가 덜 지루해한다”고 말했다.
●퇴근한 뒤 저녁에 줌 회의로 연구-논의
피치마켓은 2020년부터 특수교사들의 연구모임인 ‘피치클래스’를 운영 중이다. 피치마켓이 펴낸 도서를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사들끼리 협업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공유하려는 취지다. 2020년 17명으로 시작한 피치클래스는 지난해 31명으로 늘었고, 올해 50여 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교사들은 팀을 꾸려 쉬운 글을 활용한 수업 사례를 공유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든다. 학교 업무가 끝난 뒤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2, 3시간씩 회의하고, 1년에 한두 번 전체 교사가 모여 사례 발표도 한다.

교사들이 퇴근 후 시간까지 쪼개 피치클래스를 운영하는 이유는 각 학생에게 더 개별화된 수업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특수학급은 일반학급보다 적은 5명 안팎의 학생들로 구성되지만, 교사들이 챙겨야 할 부분은 더 많다. 학생의 장애 정도나 학습 수준에 따라 철저한 맞춤형 교육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송미경 제주여상 교사는 “교재가 아무리 좋아도 내가 담당하는 학생의 수준에 맞춰 재구성해야 아이들이 받아들인다. 새 학년에 다른 학생이 배정되면 또 새로운 교과 구성이 필요하다”며 “피치클래스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공유한다”고 말했다.
●“검정고시 합격 소식 들었을 때 가장 기뻐”
피치마켓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수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소외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쉬운 글을 통해 세상과 아이들의 접점을 늘려 나가는 게 그 시작이다. 허형곤 전북 장수 장계초 교사는 “일상과 관련된 소재를 쉬운 글로 전달하니 평소엔 ‘나와 가족’밖에 모르던 아이들의 관심사가 점점 넓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이 아이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함 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독서모임으로 처음 만난 경계선 지능 학생이 점점 책 읽기에 흥미를 갖더니, 몇 년 뒤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를 교사들의 자발적 노력에만 기대지 말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경근 단국대 특수교육과 교수는 “장애 학생을 위한 수업 준비는 일반 학생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며 “교사들의 교수법 연구 시간을 근무(수업) 시간으로 인정해 주는 등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느린 학습자#콘텐츠 기업#피치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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