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회[고양이 눈썹 No.49]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7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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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021년 5월
TV캡처

“장사라는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너무 준비를 안 하고 들어온 거에요.” (TV프로그램 ‘골목식당’의 요리연구가 백종원씨 멘트)

“니가 소상공인 모르나 본데! 우린 다 목숨 걸로 해!” (영화 ‘극한직업’에서 주인공 고반장이 빌런 이무배와 격투를 벌이며 터뜨리는 대사)

“회사가 전쟁터라고?…밖은 지옥이다.” (만화 ‘미생’ 대사)

“제가 땀을 좀 많이 흘리죠? 이거 육수도 아니고 골수에요.” (한 여름, 취재 현장에서 만난 타 언론사 사진기자의 넋두리)

“애들에게 용돈 주면서 늘 이렇게 말하죠. 이거 그냥 아빠 월급에서 주는 거 아니다. 아빠 목숨 값이야. 생명을 줄여 가며 번 돈이다.” (건강문제로 애먹는 50대 중소기업 본부장)


▽일본에는 잇쇼켄메이(一生懸命)’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 무언가를 엄청 열심히 한다’는 뜻이라고들 하는데요, 원래 ‘一所懸命(사무라이가 자신의 영지(領地) 한 곳을 목숨 걸고 지키는 것)’과 발음이 비슷해 변용됐고 ‘일생에 목숨 걸고’라는 뜻쯤으로 번역될 듯 합니다.

▽‘전쟁’, ‘목숨 걸고’, ‘지옥’, ‘죽을 각오’, ‘모가지 내놓고’….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무서운 말들입니다. 일제 강점 36년과 6.25동란을 겪은 후유증일까요? 물론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남아 세계 최빈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3가지 길만 남습니다. 패잔병, 죽음, 포로…. 전술적으로 ‘질서 있는 후퇴’를 한 뒤 훗날을 도모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전투 용어는 언론 기사에도 난무합니다. 특히 정치 기사와 스포츠 기사에. ‘저격수 정치인’, ‘토트넘 삼각편대, EPL 맹폭’, ‘OOO 한마디에 XX당 초토화’, ‘폭탄 발언’, ‘홈런왕 OOO, 장거리포 본격 가동’….

▽사회가 전쟁터가 되면 승자와 패자를 정확히 가르고 승자에게는 전리품을, 패자에겐 참혹한 결과만을 남겨줍니다. 실패자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의 서열을 정확히 나누고 사회적 혜택을 받거나, 반대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2021년 9월
2021년 9월

▽건강 문제로 사업을 접고 은퇴를 결심한 60대 지인이 있습니다. 이젠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천천히 노후를 생각해 보겠다고 하십니다. 만나 뵀을 때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연유를 물으니 “여행 계획을 짜느라 새벽3시까지 잠을 못 잤다”며 작업 중인 엑셀 파일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시간 단위 스케줄에, 맛집 탐방 계획까지 완벽하더군요. 제가 “여행 일정을 투자계획서처럼 준비하셨네요”라고 놀리자 그제서야 ‘아차’하시며 “옛날 버릇을 못 버렸다”고 하십니다. 여행 준비마저 전투 치르듯 하신 것이죠.

백두대간 종주 완료. 제주 올레길 전 구간 순례 도전. 100대 명산 등정 완료.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 인증….
도시 생활에서 지친 마음을 힐링하고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하는 이런 활동마저 무슨 게임 포인트 쌓듯, 도장 깨기 하듯 전투를 치르려 합니다. 심지어 완주 상황을 실시간으로 소셜미디어에 중계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시간에도 타인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하며 ‘승전’ 소식을 전합니다. 재미삼아 시작한 취미 생활도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고요.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에게 이런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이런 근성 때문에 성과를 이루신 것이겠지만요.

▽그런데 이 ‘전쟁’를 거부하는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참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반 강제적으로 다 끼어든 이 전쟁에 이제 참전을 회피하거나 징집 자체를 과감히 주도적으로 거부하는 운동이 벌어진다는 느낌입니다.

‘취업 전쟁’과 ‘육아 전쟁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대표적입니다. 정식 취업하지 않고 임시직으로 일하다 몇 개월 내에 그만두거나 아예 프리랜서처럼 활동하는 노동자들이 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노동시장의 변화에 ‘긱 경제(Gig Economy)’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노동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직업의 안정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죠.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필요할 때만 고용하는 형태라 사업주에게만 유리할 것 같지만 오히려 이를 선호하는 근로자도 많다고 합니다. 배달라이더 같은 업종이 대표적이죠. “취업시장이 얼어붙어서“가 1차 원인이겠지만 기업들의 신입사원 1년 이내 퇴사율이 25% 안팎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도 크게 미련을 갖지는 않는 듯 합니다.

출산·육아 전쟁 징집도 거부합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여성의 합계출산율은 0.81명입니다. 여성만 출산 거부하는 것 아닙니다. 많은 남성들도 동참 중입니다. 기성세대의 ‘졸업→취업→결혼→출산→육아·교육’ 공식을 거부하는 것이죠.

결혼도 미루거나 안 하고 설사 한다 해도 아이를 안 가집니다. 출산 전쟁은 곧 육아 전쟁, 교육 전쟁으로 이어져 평생에 걸친 장기전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죠. 아예 처음부터 참전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제 주변의 한 부부는 “아이가 이런 전쟁터에 억지로 내몰리는 꼴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동아일보 DB

이와는 반대로 입시·취업전쟁에 승리해 이른바 ‘좋은 직업’을 얻은 분들은 기득권이라는 훈장을 받습니다. 심지어 이 전리품을 쥐고 사다리를 걷어차 서열을 공고히 하려들기까지 하는 일부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이죠. 계약직의 정규직 변경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그 예라고 봅니다. 그런데 애초에 참전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전리품에 그다지 관심 없습니다. 이들을 일본에선 사토리 세대, 한국에선 득도 세대라 명명하기도 하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평균’의 수위가 너무 높아서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위해서는 ‘보통’ 이상 수준의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너무 높게 설정돼 있다는 뜻이죠.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모르니 그냥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주장입니다.

경쟁심리를 버리기 힘들다면, 전쟁이나 전투까지는 하지 말고 수위를 좀 낮춰 단순한 게임을 하면 어떨까요. 도박 말고 게임이요. 야구처럼 게임은 오늘 지더라도 내일 경기가 계속 열리니까요. 꼴지라도 어떤가요. ‘찐팬’이라면 부처님 마음으로 응원할 수 있잖아요. 아무리 축구가 전쟁이라지만 ‘월드컵을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관람하면 지더라도 충분히 좋지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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