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불합격’ 크레인, 그대로 공사 투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서울시 이동식 크레인 합동점검 결과
29대서 안전위반 132건 적발, 강철줄 손상 방치… 경고음 꺼놔
소규모 공사장일수록 장비 불량


4월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 신축 현장. 3대의 이동식 크레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외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합동점검반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알고 보니 크레인 중 1대는 1월 안전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기계였다. 붐대(본체에 달린 작업 팔) 등이 달린 크레인 윗부분(선회 장치)의 상태 불량, 자동차의 번호판과 같은 ‘등록번호표’의 봉인 손상 등이 이유였다. 불합격된 장비는 최대 1년 이내에 정비를 받아 재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크레인은 정비도 받지 않고 현장에 재투입됐다. 정비 기간 내에 현장에 투입해도 처벌할 수 없는 애매한 규정을 악용한 것이다.

다른 두 대도 상태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대는 와이어로프(붐대와 고리를 연결할 때 쓰이는 강철 줄)가 손상돼 있어 끊어질 우려가 있었다. 1대는 ‘권과 방지 장치’라는 안전장치의 알람을 강제로 꺼둔 채였다. 이러면 크레인의 로프가 과도하게 말려 올라가 충돌해도 경고음이 울리지 않는다. 조성주 서울시 시설안전과 주무관은 “상점에서 오작동을 이유로 화재경보장치를 몰래 꺼놓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장비만 설치해 놓고 실제로는 작동을 안 하니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공사장에서 크레인 안전사고가 잇따르면서 추가 사고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4월 16일부터 5월 15일까지 시내 공사장 16곳의 이동식 크레인 29대를 안전 점검한 결과 132건의 지적사항이 나왔다고 9일 밝혔다. 1대당 평균 4.5건이다. 한 번에 9건의 지적사항이 나온 현장도 있다. 특히 소규모 공사장일수록 장비 상태는 물론이고 현장 근로자의 안전 의식 수준이 높지 못했다는 게 합동점검반의 결론이다.

지난해 타워크레인 사고로 전국에서 19명이 숨지고 46명이 부상을 입었다. 서울에서는 6, 12월 각각 영등포와 강서의 공사 현장에서 이동식 크레인 사고가 나 모두 3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다쳤다. 전자는 장비 결함, 후자는 부족한 안전 관리가 주된 사고 원인으로 꼽혔다.

점검 현장의 크레인과 각종 장비에서는 71건의 지적사항이 쏟아졌다. 크레인이 자재를 들어 옮기는 데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와이어로프와 슬링벨트(자재를 묶어 올릴 때 쓰는 넓적한 벨트)의 상태 불량 건수는 17건에 달했다. 두 개 모두 큰 하중을 견뎌야 하는 장비라 작은 불량이나 손상이 있어도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휘어지거나 갈라져 적은 무게에도 꺾일 우려가 있는 붐대도 6곳에서 발견됐다. 등록번호판이 손상됐거나 제작연도가 보이지 않는 크레인 2대도 발견됐다. 등록번호판 봉인을 손상한 경우 심하면 고발 조치될 수도 있다. 미등록 기기에 번호판을 바꿔 달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장 근로자들의 안전 의식도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자재가 추락하더라도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크레인 근처를 막는 울타리(방호울)를 치지 않은 경우가 10곳에 달했다. 경고표지판 등을 붙여놓지 않거나(18건) 신호수(수신호, 무전기 등을 이용해 크레인의 작업을 돕는 근로자) 없이 작업을 한 곳(4곳)도 있었다.

서울시는 등록번호표 봉인이 없거나 훼손된 2대에 대해서는 각각 등록된 지방자치단체에 행정처분을 요청했다. 지적 사항이 나온 크레인과 현장의 조치 결과를 확인한 뒤 필요하면 추가 점검도 벌일 방침이다. 고승효 서울시 시설안전과장은 “검사에 불합격한 크레인의 현장 투입을 막고, 중량물 취급 작업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법 개정을 국토교통부에 건의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크레인#공사#안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