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인승에 40명 태우고… 농촌 ‘밭일버스’ 위험한 질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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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참사 뒤엔 안전 불감증

“나는 버스 복도에 그냥 깔개 놓고 앉았어.”

3일 전남 영암군의 한 마을에서 만난 강모 씨(80·여)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강 씨가 복도에 쭈그려 앉았던 차가 바로 1일 발생한 사고로 8명이 숨진 미니버스다. 강 씨는 이 버스를 타고 일주일에 두세 차례 밭일을 갔다.

사고 버스는 25인승이다. 2인승 좌석이 중앙통로를 두고 나란히 배치된 구조다. 농사일이 많을 때는 일하려는 할머니들이 몰렸다. 버스 좌석이 모자랐다. 그럴 때면 중앙통로에 할머니들이 앉았다. 강 씨는 “많을 때는 40명이 탈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버스는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을 빽빽이 태우고 1시간 가까이 운행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사고가 났다면 대형 인명피해가 날 수밖에 없었다.

○ “안전벨트 착용 안내 받은 기억 없어”

농번기에는 일손이 많이 부족하다. 노인 한 명의 일손도 아쉽다. 농사를 크게 짓는 주인들은 더 많은 노인을 동원하려 애쓴다. 일손 요청은 밭 주인→버스운전사→모집반장 순으로 전달된다. 사고가 난 영암군 A마을과 인근 나주시 반남면 B마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모집반장은 홍보와 모집 역할을 한다. 이들은 일당으로 8만∼9만 원을 받는다. 밭일을 하는 할머니가 받는 일당(보통 7만 원)보다 1만∼2만 원 많다. A마을 주민 안모 씨(62·여)는 “농번기에는 모집반장 일당이 더 뛴다. 마을에 따라 30명 이상을 모집하면 일당의 2배 정도(12만∼14만 원)를 지급한다”고 말했다.

버스운전사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한 명이 탈 때마다 운전사는 1만5000원을 받는다. 밭 주인이 운전사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수수료다. 할머니들이 많이 탈수록 운전사도 더 많은 돈을 받는다. 탑승 인원이 수입과 직결되는 구조다.

이런 식으로 일손을 모았지만 안전수칙 공지 같은 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강 씨 등은 버스에 탔을 때 안전벨트 착용 안내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당일은 차에 탄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만약 평소처럼 30명 넘게 탔으면 더 많이 죽었을 거다. 이제 일하러 나가기가 무섭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을 태워 가는 버스는 늘 새벽에 떠난다. 버스운전사는 대부분 고령이다. 피로가 누적됐을 가능성이 있다. 주민 최모 씨(74·여)는 “운전사가 오전 3, 4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오느라 오후에 노곤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이게 농촌의 현실인데 어쩌겠느냐”고 한탄했다.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 외딴 시골마을이라 상시 단속이 쉽지 않다. 앞으로 불법 현장이 적발되면 엄중히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 블랙박스에서 ‘운전사 목소리’ 사라져

경찰은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블랙박스를 분석 중이다. 영상을 보면 2차로를 달리던 버스는 1차로를 주행 중이던 흰색 코란도 차량의 우측 사이드미러를 스친 뒤 10초가량 ‘갈지(之)자’ 형태로 곡예운전을 이어간다.

특히 경찰이 주목하는 건 버스 내부의 음성이다. 블랙박스는 외부 영상을 찍는 대신 내부는 촬영되지 않는다. 다만 탑승자 대화 등 내부 음성이 녹음된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 직후 여러 할머니가 놀라 비명을 지르지만 운전사 이모 씨(72)의 음성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경찰 관계자는 “보통 차량 결함으로 인한 사고 때는 운전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번 사고의 블랙박스에는 운전사 목소리가 없다. 운전사가 갑자기 정신을 잃는 등 신체적인 문제나 졸음운전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지 않고 수사 중이다”라고 밝혔다.

경찰은 이 씨 유족의 동의를 얻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시신 부검을 의뢰했다.

영암=배준우 jjoonn@donga.com·이형주·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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