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Exit, 불나면 지옥… 서울 종로-영등포-용산구 ‘쪽방 골목’ 둘러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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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중구의 한 여인숙 건물 1층 객실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돼 있다. 절도범의 침입을 막으려는 목적이지만 비상시 탈출을 막아 피해를 키울 수 있다. 정다은 기자 dec@donga.com
22일 서울 중구의 한 여인숙 건물 1층 객실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돼 있다. 절도범의 침입을 막으려는 목적이지만 비상시 탈출을 막아 피해를 키울 수 있다. 정다은 기자 dec@donga.com
22일 서울 종로구 A여관.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비상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야 겨우 비상구를 찾았다. 앞에는 폐정수기와 여행용 가방, 의자, 상자 등이 어른 키만큼 쌓여 있었다. 유명무실한 비상구였다. 이틀 전 방화로 6명이 숨진 종로구 서울장여관 상황과 비슷했다. 불이 난 여관 비상구도 자물쇠로 잠겨 있어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열기 어려웠다.

A여관도 1970년대 지어진 2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서울장여관처럼 만약 새벽에 불이 나면 큰 인명피해가 우려됐다. 서울장여관 소식을 들었다는 A여관 주인은 “우리는 그런 이상한 손님 안 온다”고 말했다.

○ 곳곳에 자리한 ‘서울장여관’ 판박이

동아일보 취재팀은 21, 22일 서울 종로와 영등포, 용산 일대의 이른바 ‘쪽방 여관’ 15곳을 살펴봤다. 대부분 1960, 70년에 지어져 40∼50년 된 건물이었다. 모두 서울의 낙후된 도심에 자리 잡은 이들 여관은 사고가 난 서울장여관처럼 화재 대비에 심각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였다.

객실 12개가 있는 대학로의 여관은 객실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정문밖에 없었다. 비상구가 아예 없었다. 여관 주인은 “3층 옥상으로 대피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성인 남성 1명이 지나가기에도 비좁았다.

비상구가 갖춰지지 않은 쪽방 여관에서 스프링클러 등 소화 시설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관 15곳 중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곳은 2곳에 불과했다. 서울 중구의 한 여인숙은 소화전이 없어 소화기를 10여 개 구입해 비치해 뒀다. 객실 수(18개)에 비해 부족했다. 이 여인숙 1층 객실 창문에는 쇠창살이 설치돼 있어 창으로도 대피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인근의 또 다른 여관 사장(76)은 “최근 불이 자주 나 나무를 다 들어내고 콘크리트로 바꿨는데도 여전히 겁이 난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의 한 여관 정문 앞은 전깃줄이 제멋대로 엉켜 있고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현관 앞에 빛이 바랜 소화기가 있었다. 제작연도 1994년. 소화기는 제조 뒤 10년이 지나면 성능점검을 받거나 교체해야 하지만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2층 소화기의 제작연도는 2005년이었다.

이들 여관은 불이 나도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어려웠다. 여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폭이 2∼3m에 불과했다. 골목 중간 중간 전봇대가 설치돼 있어 소방 차량이 지나가기는 더 어려워보였다.

쪽방촌과 여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20일 발생한 화재 참사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22일 찾은 서울 영등포역 일대 쪽방촌 골목에서는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6∼7m² 정도 크기의 방마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와 먼지가 쌓인 전기장판 등이 눈에 띄었다. 한 여성 세입자(41)는 “재료들이 다 나무라 불이 나면 소화기는 ‘물뿌리개’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22일 창신동의 한 쪽방촌에서는 집 한 곳에서 불이 나 주민과 인근 모텔 투숙객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사고 현장 바로 옆 건물에 부탄가스와 휴대용 가스버너가 다수 발견됐다. 주민 김모 씨(67)는 “방마다 가스버너가 하나씩은 있었을 텐데 불이 번져 부탄가스가 터졌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 소방법 사각지대에 놓인 쪽방촌

쪽방촌 건물 대부분은 수십 년 전 지어진 것이 많아 건축법이나 소방시설법(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을 적용받지 않는다. 특히 쪽방 여관은 숙박시설이라 소방시설법 적용 대상이지만 2003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비상구를 갖춰야 할 의무가 없다. 불이 났을 경우 사상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곳이라 맹목적으로 규제만 강화하기도 쉽지 않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기존 시설을 잘 관리하면서 관리자 교육을 철저히 하고, 중장기적으로 소방 관련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투 트랙’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장여관 방화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혜화경찰서는 숨진 6명의 시신을 22일 오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1차 부검을 진행했다. 여행 중 참변을 당한 세 모녀는 유전자 검사를 추가로 진행하기로 했다.

피의자 유모 씨(53·구속)는 이날 경찰에 2차 조사를 받았다. 유 씨는 “펑 소리에 놀라 도망가다 112 신고를 했다. 멍하다”고 진술했다. 정신병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권기범 kaki@donga.com·정다은·전채은 기자
#쪽방골목#화재#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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