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명인열전]현악기장 박경호씨 “나만의 소리 찾아야죠”… 패션 일 하다 ‘현악기 만들기 20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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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소리 찾는 목수’ 박경호씨

전북 부안군의 흙집에서 바이올린을 만드는 박경호 씨는 ’소리 찾는 목수’다.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세상의 속도와 다르게 홀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전북 부안군의 흙집에서 바이올린을 만드는 박경호 씨는 ’소리 찾는 목수’다.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세상의 속도와 다르게 홀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5월 중순 인천공항. 6명의 남성이 바이올린과 첼로 등 악기를 2대씩 둘러메고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은 한 장인이 만든 현악기를 오스트리아까지 실어 나른 ‘악기 원정대’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악기 전시회에 초청을 받은 장인이 악기 한 대에 수백만 원까지 하는 항공 운송료를 낼 돈이 없어 고민하자 그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그럼 우리가 같이 둘러메고 가자’고 나선 것이다.

 악기 원정대에는 제주에서 온 시인, 강원 삼척의 한옥 목수, 전남 함평의 작가에다 장인의 고향마을 한의사와 이장이 동참했다. 모두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이 수제 악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장인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잘 알기에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자비로 마련한 비행기 표를 들고 장인의 집에 모인 악기 원정대는 보름간 오스트리아 전시를 마친 뒤 11대의 현악기를 다시 장인의 집에 돌려주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갔다. 전북 부안의 흙집에서 20년 가까이 나무에 선율을 새겨 온 ‘소리 찾는 목수’ 박경호 씨(47)가 이들이 들고 간 악기를 만든 장인이다.

○ 소리 찾는 목수

 뭔가에 홀린 느낌이랄까. 작업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나무가 마르면서 나는 특유의 향과 악기의 선이 너무 황홀했어요. 나무를 깎는 악기공들의 뒷모습도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죠.”

 1999년 이탈리아 중부 페루자 인근 구비오 현악기 제작학교에 들어선 순간을 박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여성복 패션 일을 하다 외환위기로 부도가 나면서 무작정 떠나온 여행길이었다. 마침 신입생 모집 기간이어서 무모하게 원서를 냈다. 가이드의 통역으로 면접을 볼 때 “바이올린을 만져 본 적도 없지만 기회를 준다면 정말 좋은 악기를 만들 자신이 있다”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진심이 통했는지 한국인으로는 구비오 1호 유학생이 됐다. 아내에게는 패션학교에 입학했다고 속이고 생활비를 받았다.

 3년 동안 낮이고 밤이고 교수들을 찾아다녔다. 한국에 돌아가면 물어볼 스승도 없기에 최대한 많이 시도하고 실패해 보자는 마음으로 매달렸다. 영어도 이탈리아어도 못 하는 동양인 제자를 위해 교수들은 그림을 그려 가며 악기 제조 기법을 가르쳐 줬다.

 ‘너의 소리를 담아라.’ 교수들은 지시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말고 창의적인 고민을 하라고 주문했다. 졸업할 때는 실기 점수 만점을 받았다. 꼴찌 합격에 수석 졸업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2003년 귀국해 호기롭게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차렸지만 국내 현악기 시장의 현주소를 파악하지 못한 탓에 고배를 마셨다. 작업장 월세는 고사하고 악기 만들 나무마저 구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유명인의 작품이나 오래된 악기만을 선호했다. 음악 전공 학생들은 교수가 주문하면 멀쩡한 악기를 두고 새것을 사기 일쑤였다. 국내 현악기 장인들은 대부분 악기 수리로 생활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쩌다 악기를 수리하려는 사람이 와도 그냥 돌려보냈다. 굳이 고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작된 바이올린이 수제로 둔갑해 팔리는 현실도 알게 됐다. 악기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제작 과정과 제작 일지를 인터넷에 매일 올렸더니 ‘음악계의 틀을 깨려 하지 마라’는 반발도 있었다.

○ 사연 담은 창작 변형 악기  

 2007년 고향인 부안에 와 2년에 걸쳐 흙집을 손수 지었다. 황토로 지은 흙집은 하나의 큰 악기다. 그는 악기 안에서 악기를 만든다. 흙집 안에서 퍼지는 음의 소리가 공명이 다르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기 때문에 흙집을 떠나서는 작업을 할 수 없게 됐다. 수백 년을 내다보는 악기를 만드는 그에게 배고픔은 두렵지 않다. 과르네리나 스트라디바리처럼 세계적인 명품 악기도 세월이 만든 소리라고 믿는다.

 지금도 악기 재료 살 돈이 떨어지면 막노동을 하고 바닷가에 바지락 종패 뿌리는 작업도 거든다. 아무리 몸이 고되도 밤이면 두어 평 남짓한 그의 흙집 공방에서 외롭게 나무를 깎는다.

 그가 만든 악기에는 저마다의 이야기와 이름이 있다. 아들이 태어날 때 병원비가 부족해 팔려고 가지고 나갔다가 끝내 집에 들고 온 비올라는 ‘아들을 위한 변주곡’, “맹글면 팔리기는 허냐”면서도 말없이 지켜봐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실의에 빠져 있다가 6개월 만에 다시 칼을 잡고 만든 바이올린의 이름은 ‘어머니의 심장’이다. 이 바이올린에는 어머니의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칠했다. 남과 북이 한 몸이 되는 날을 꿈꾸며 한반도 모양으로 만든 창작 바이올린은 ‘한반도의 꿈’이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만난 유명 셰프 박찬일 씨가 모르게 놓고 간 돈으로 나무를 사 만든 클래식 기타의 이름은 ‘찬일 TESTA’다.

“나만의 소리를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소리를 찾으려 골몰합니다. 평생 숙제죠.”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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