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정재락]울산 태화시장 상인들의 분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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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락·부산경남취재본부
정재락·부산경남취재본부
 김영찬 씨(68)가 울산 중구 태화시장으로 이사를 온 것은 33년 전인 1984년 8월. 울산 토박이인 김 씨는 시장 내 상가 딸린 2층 주택으로 이사 와 상가 임대수입으로 별 어려움 없이 생계를 꾸려왔다. 주위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지만 최근 울산을 덮친 태풍 ‘차바’가 김 씨의 삶을 바꿔놓았다. 12일 출범한 ‘울산 태화시장 및 주변 피해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것이다. 자신의 주택과 임대상가 1층이 물에 잠겨 버린 김 씨는 “많은 비가 내려도 끄떡없던 태화시장이 이번에 물에 잠긴 것은 함월산 중턱에 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배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책위는 울산 혁신도시 시공사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로 하고 LH 규탄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태화시장 상인을 더 격분하게 한 게 또 있다. 하천 제방 붕괴 등 공공시설물이나 농경지 피해가 컸던 울산 북구와 울주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지만 상가와 주택 차량 침수 등 사유재산 피해가 많은 중구는 제외된 것이다. 이들은 “태풍 직후부터 국무총리와 장관, 여야 정치인들이 뻔질나게 시장을 돌아다니며 ‘특별재난지역 우선 선포’ 약속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허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의 분노는 11일 폭발했다. 박성민 울산 중구청장은 이날 오전 태화시장을 찾는 송언석 기획재정부 2차관에게 중구 특별재난지역 선포와 피해 상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책 등을 건의하기 위해 브리핑을 준비했다. 하지만 송 차관은 “봉사활동 하러 왔다. 브리핑은 울산시청에서 이미 받았다”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박 구청장은 “봉사활동은 우리가 한다. 차관께서는 현장 이야기를 듣고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며 언성을 높였다. 상인들은 송 차관에게 “제발 살려 달라. 앞길이 막막하다”며 울먹였다. 30분 만에 자리를 뜬 송 차관을 향해 “생색이나 내려는 높은 양반들은 꼴도 보기 싫다”며 삿대질하는 상인도 많았다.

 황당한 일도 있다. 홍수경보가 발령된 태화강 제방으로 황톳물이 넘실대던 5일 낮 12시경 태화강 둔치에 설치된 국토교통부 홍수통제소 전광판에는 홍수 관련 문구는 한 자도 없이 ‘119 안전문화축제’의 홍보성 광고가 한가롭게 나오고 있었다. 시민들은 “탁상행정 복지부동하는 공직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혀를 찼다.

 태풍 ‘차바’는 70년 가까이 평범하게 살아온 김 씨를 ‘투사’로 만들었다. 본래의 김 씨로 돌아오게 하는 건 정부와 자치단체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재락·부산경남취재본부 ra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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