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진흡]버티려면 붉은 머리띠부터 풀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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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흡 산업부 차장
송진흡 산업부 차장
지난달 20일 경남 통영시 통영해안로 강구안 문화마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역본부가 마련한 ‘조선업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 총파업―총력투쟁 경남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금속노조 경남본부 간부들과 일자리를 잃을 것을 우려한 조선업체 근로자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주최 측에서 ‘조선업 구조조정 중단’ ‘조선노동자 총고용 보장’ 등 구호를 외치자 대회 참가자들은 환호했다. 그러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 배치 철회’라는 구호가 나오자 일부 대회 참가자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성주도 아닌데 무슨 소리야.” “구조조정 막자는 곳에서 사드가 왜 나와.”

조선업체 근로자로 이날 대회에 참가한 후배가 며칠 전 들려준 얘기다. 그는 “금속노조가 근로자의 절박함을 이용해 ‘정치 파업’을 하려는 것 같아 언짢았다”고 말했다.

부분 파업을 벌이다 최근 단체로 여름휴가를 간 조선업체 근로자들 사이에서 ‘노조 집행부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금속노조와 함께 조선업종노조연대까지 만들어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특히 이번 파업이 상급 노동단체의 입김에 좌우돼 정치 투쟁으로 비화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부 근로자는 파업이 채권단에 돈줄을 죌 명분을 줄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채권 회수가 목적인 채권단으로서는 파업에 들어간 조선업체에 대해 대출금 관리를 깐깐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선 경기가 회복될 때를 대비해 인력 감축을 최소화하려는 조선업체들이 버틸 재간이 없다. 구조조정을 막으려는 파업이 오히려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파업으로 조선소 일감 확보에 ‘빨간불’이 켜진 것을 걱정하는 근로자도 있다. 파업으로 제때 선박을 건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면 수주가 어려워져 구조조정 압력이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최길선 회장과 권오갑 사장이 지난달 28일 담화문을 통해 “여러분이 선주라면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파업하는 회사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공사를 맡기겠느냐”며 파업 자제를 호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업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근로자가 적지 않지만 노조 집행부는 ‘파업 카드’를 거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노동 전문가들은 노동계 내부 역학 관계와 목소리가 큰 강경파가 득세하는 노조 내부 사정을 감안하면 조선업체 노조 집행부가 스스로 파업을 접는 결단을 내릴 여지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결국 ‘파업→수주 감소→구조조정 압력 가중→인력 감축→경쟁력 저하’라는 악순환이 거듭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조선업은 경기가 나쁠 때는 손가락을 빨아야 하지만 경기가 좋아지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수주사업이다. 당장 어렵더라도 잘 버티면 다른 어느 산업보다도 반대급부가 크다. 섣부른 정치 파업으로 조선업체의 ‘버티기’를 흔드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 등 경쟁국 조선업체들만 이롭게 할 뿐이다. 1993년 이후 20년 이상 세계 1위를 굳건히 한 한국 조선업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조 집행부는 붉은 머리띠부터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업 패권을 잃어버린 스웨덴이나 영국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
#민주노총#금속노조#조선업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정치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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