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액자 밖 모든 공간이 미술관… 미술은 대중과 소통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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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지 않는 미술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미술은 대중과 호흡해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습니다. 실내 전시실, 액자에 갇힌 그림을 꺼내 밖으로 나가자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미술관이었습니다. 대중과 미술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김해곤 제주섬아트연구소장(50)은 국내에 ‘공공미술’을 도입한 주역이다. 그는 공공미술의 하나로 ‘마을에 예술이라는 옷을 입히는’ 마을 미술프로젝트를 펼치며 미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3일 김 소장이 운영하는 제주시 도남동 ‘갤러리 비오톱’에서 그를 만났다. 비오톱은 생명, 장소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66m²의 자그마한 공간으로, 사람과 문화·예술이 만나는 ‘도시 사랑방’이다.

“대학 졸업 후 개인전을 열어도 가족이나 친구들 외에는 봐주는 관람객이 없었어요. 비싼 등록금을 내서 열심히 배웠고, 열심히 그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뿐이었습니다. 미술관이 특정인들만을 위한 기능을 하고 있었어요. 돌파구가 없으면 예술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심정으로 액자에서 그림을 떼 내고 거리로 나갔던 거예요. 이것이 공공미술이라는 사실도 몇 년 뒤에야 알게 됐어요.”

김해곤 소장은 마을에 예술을 입히는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에 공공미술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김해곤 소장은 마을에 예술을 입히는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에 공공미술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 찾아가는 미술관

김 소장은 199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직후부터 1996년까지 매년 네 차례가량 개인전을 갖는 등 열정적으로 회화작업을 하다 일순간 멈췄다. 봐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슷한 고민을 하는 작가들을 규합했다. 1998년 ‘21세기청년작가협회’를 설립하고 첫 번째 기념행사로 한강시민공원에서 ‘한강깃발미술제’를 열었다. 200여 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한 평면, 입체, 설치를 아우르는 대규모 야외 미술축제였다. 국내 ‘공공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김 소장이 예술작업의 화두로 내건 ‘깃발’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에게 깃발은 정치적 상징이 아니라 바람과 대기, 빛을 표현하고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도구였다.

그는 대형 깃발 설치 작업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2002 한일 월드컵 공식문화행사-깃발미술제’를 비롯해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제주바람예술제’, 2006년 ‘광복 61주년 서울시청사 모뉴먼트 프로젝트’, 2008년 ‘세계람사르총회 기념 설치미술’, 2009년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설치미술’ 등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공공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설치미술로 이름을 알려가고 있을 즈음 문화체육관광부가 ‘마을 미술프로젝트’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화가, 공공미술작가에서 기획자라는 운명적 역할을 마주한 것이다. 그에게 총괄감독이라는 중책이 주어졌다. 2009년부터 시작된 마을 미술프로젝트는 전국 곳곳으로 번져나가 지난해 말까지 76개 마을에서 진행됐다. 미술작가들에게 일자리 나눔을 지원하기 위해 시행한 단순한 사업이 지역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프로그램으로 도약했다. 일상의 생활공간이 테마가 담긴 미술공간으로 탄생하고, 버려진 공간이나 낙후된 마을이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국내에 공공미술을 처음 도입한 김해곤 소장은 2012년 탐라대전에서 깃발작품전을 여는 등 깃발을 소재로 한 설치미술을 하고 있다. 김해곤 소장 제공
국내에 공공미술을 처음 도입한 김해곤 소장은 2012년 탐라대전에서 깃발작품전을 여는 등 깃발을 소재로 한 설치미술을 하고 있다. 김해곤 소장 제공
○ ‘마을 미술’로 피어난 공공미술

부산 감천문화마을은 이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피란민촌이라는 역사적 콘텐츠에 예술이 더해지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유네스코(UNESCO) 교육프로그램 장소가 됐다. 제주 서귀포시 송산, 정방동 일대 음습하고 칙칙했던 골목은 ‘유토피아로(路)’로 재탄생하면서 예술 섬을 상징하는 대표 명소가 됐다. 마을 미술프로젝트는 해를 거듭할수록 진화했고 참여 작가는 물론이고 장르 역시 회화, 조각, 디자인, 공예,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으로 다양해졌다.

“마을 미술을 처음 진행할 당시 지역주민의 반대와 문전박대로 가슴앓이를 많이 했어요. 사업기간의 절반 정도를 주민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하는 데 허비하기도 했죠. 온갖 우여곡절 끝에 청소년 탈선 장소가 골목 미술관으로 바뀌고 쓰레기매립장이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한 후 주민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행복했습니다.”

김 소장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도 진력하고 있다. 내년 제주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전을 준비하고 있다.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다. 프랑스에도 진출해 ‘평화’를 주제로 깃발전을 열 계획이다. 전북 남원 출신인 김 소장은 2003년 아내(45)의 고향인 제주에 뿌리를 내렸다. 서울에서 원인을 모른 채 앓았던 열병이 제주에 정착하면서 사라졌다. 제주에서 깃발 작품을 하면서 인생의 날줄과 씨줄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은 더욱 건강해졌다. 이제 ‘제주사람’이 다 된 김 소장은 “제주가 육체의 고향과 전혀 다른 ‘영혼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 공공미술 ;;

공공장소에 전시하거나 설치한 미술작품이나 공공영역에서 이뤄지는 미술활동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미술관을 벗어나 장소의 특이성을 고려한 미술, 지역주민과 작가가 공동으로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공동체 미술, 사회적 문제를 조형적으로 재현하는 미술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은 거리미술, 벽화 등 공공미술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만 처음 등장할 당시에는 ‘무모한 실험’으로 비치기도 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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