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여중생 사건’ 당시 형사 뿔뿔이… 미제 해결 ‘산넘어 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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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된다지만… 제도 뒷받침돼야

형법상 살인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를 통과했다.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경기 포천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은 장기미제 사건 기록이 보관된 캐비닛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캐비닛 안에는 2003년 11월 실종돼 2004년 2월 포천시 소흘읍의 한 배수로에서 알몸 시신으로 발견된 엄모 양(15·당시 중학교 2학년) 사건의 자료가 가득하다. 당시 경찰은 6개월 이상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2018년 만료될 예정이던 공소시효는 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여중생 사건을 잘 아는 형사는 포천서에 남아 있지 않다. 포천서 강력계의 한 경찰은 “공소시효 폐지는 분명히 형사의 집념을 일깨우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아무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수사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일명 ‘태완이법’으로 불린다. 1999년 황산테러를 당한 고 김태완 군의 이름을 딴 법안이다. 국민 여론은 흉악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크게 반기고 있다. 하지만 수사 현장의 상황은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 과연 얼마나 많은 장기미제 사건이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2011년 창설된 각 지방경찰청의 장기미제 사건 전담팀 사정도 포천서와 비슷하다. 장기미제 사건 전담팀은 수사본부까지 설치됐던 강력범죄 미제사건을 중심으로 수사를 하고 있다. 2004년 경기 화성 여대생 실종, 2008년 대구 초등생 납치 살인, 2009년 제주 어린이집 여교사 살해 등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현재 전국 16개 지방청의 전담팀 소속 형사는 모두 50명. 서울경찰청 소속 11명을 제외하면 각 지방청에 2, 3명 정도 근무하고 있다. 20대 여성의 억울한 죽음을 수사 중인 한 지방청 전담팀 형사는 “새로운 강력사건이 일어나면 지원 근무를 하다 보니 미제사건 해결에만 집중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른 지방청 전담팀 형사도 “인사고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니 실적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는다. 공을 들여 장기미제 사건을 해결해도 다른 사건과 동급으로 취급되니 힘이 빠질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2010년 이후 공소시효가 만료된 강력범죄는 매년 200∼300건에 이른다. 올해 상반기에만 101건이 만료됐다. 매년 200∼300명의 흉악 범죄자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소시효 폐지가 실제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추가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잦은 보직 변경, 순환 근무로 경찰이 한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며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충분히 수사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공소시효가 폐지돼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전담팀 형사들은 공소시효 폐지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22일 만난 서울경찰청 장기미제 사건 전담팀 형사들은 표정이 밝았다. 최근 과학수사 기법이 발달해 기술적으로 미제사건 해결 가능성이 커졌지만 공소시효 만료가 마음의 걸림돌이었다. 현재 전담팀은 가출이나 자살 정황이 없는 미제사건 중 타살로 의심되는 8건을 수사 중이다. 갑자기 사라진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며 집 전화번호도 바꾸지 못하는 피해 가족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사건에 매달리고 있다.

정지일 전담팀장은 “공소시효가 폐지되면 범죄자는 끝까지 쫓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끝까지 수사하는 것만으로도 억울한 피해자 가족들에겐 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이 같은 전담팀의 필요성을 고려해 빠르면 9월 전국 전담팀 형사를 72명으로 증원할 계획이다.

박훈상 tigermask@donga.com·김호경 기자
#포천#여중생#공소시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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