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직장상사의 사소한 농담에 머리 쥐어뜯지 마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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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관능적인 몸에는 황금 지점이 몇 개가 있는데, 나는 늘 그게 세 개라고 생각했어. 허벅지, 엉덩이, 가슴.” 라몽은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지…”라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 더, 배꼽을 추가해야 한다고 깨달은 거야.” ―‘무의미의 축제’(밀란 쿤데라·민음사·2014년)  

소설의 주인공 알랭은 골반 바지에 짧은 티셔츠 차림을 한 여성의 배꼽을 보고 문득 생각에 잠긴다. 그는 여성의 성적 매력에 대해 허벅지는 에로스의 성취로 이어지는 매혹적인 긴 여정, 엉덩이는 표적을 향한 최단거리의 길, 가슴은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동정녀 마리아의 신성(神聖)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배꼽의 에로티시즘은 무엇일까.

어릴 적 배꼽이 못생겼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툭 튀어나온 참외배꼽은 아니지만 배꼽 구멍이 남들보다 크다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곤 했다. 사실 배꼽은 탯줄을 자르고 난 흉터다. 일종의 흔적 기관일 뿐 역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밀란 쿤데라는 배꼽이 못생긴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수없이 많은 엉덩이 중에서도 자기가 사랑한 엉덩이는 알아볼 것 같아. 그렇지만 배꼽을 가지고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배꼽은 다 똑같거든.” 그는 배꼽의 존재가 객체성이라는 환상을 깨는 증거라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어머니의 배 속에 쇠똥처럼 떨어져서 세상에 내던져졌다. 성(性)도, 눈 색깔도, 태어난 시대도, 나라도, 어머니도, 정작 중요한 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지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 심지어 연예인의 사소한 스캔들에 음모론이 뒤따르고 하찮은 농담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쿤데라는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존재의 본질은 하찮고 무의미한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거창한 운명이나 치열한 삶에 매몰돼 무의미한 것들의 축제에서 소외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직장상사의 사소한 농담에 괜한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 역시 못생기고 보잘것없는 내 배꼽을 사랑하기로 했다.

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
#밀란 쿤데라#배꼽#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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