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강제동원 희생자 18위 고국품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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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년만에… 유해 28일 봉환, 현지서 한인 묘 1만여기 확인

황모 씨(72)의 아버지(1911년생)는 1943년 10월경 정든 고향 땅인 전북 장수군을 떠나 약 2000km 떨어져 있는 사할린으로 향했다. 당시 일제는 마을 단위로 징용 인원을 할당했고 동네 청년 중에서 ‘심지 뽑기’를 한 끝에 황 씨의 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가게 된 것.

당시 어린아이였던 황 씨는 “탄광에서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텼던 아버지는 6·25전쟁 전까지는 편지로나마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이마저도 뚝 끊겼다”고 밝혔다. 남편 없이 홀로 3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남편과 함께 강제 징용된 태모 씨로부터 ‘남편이 사할린 탄광에서 사망했다’는 짧은 편지를 1978년에 받았다. 황 씨는 “2003년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도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찾아와서 내 옆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황 씨는 28일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유골과 만난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 지역으로 강제동원된 한국인 희생자의 유골 18구가 28일 봉환된다. 이들 대부분은 1938년 4월 1일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사할린의 탄광과 군수공장으로 끌려갔으며 70여 년 만에 유골로나마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당시 일제가 운영하고 있던 남사할린의 탄광은 총 56개였고 이 중 35개 탄광 작업장에 한인들이 강제동원됐다.

이번 봉환 사업을 주도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는 현재까지 1만여 기의 한인 묘를 확인했다. 광복 당시 사할린 내 한국인 거주자는 4만3000명가량 됐지만 이들은 6·25전쟁 이후 계속된 냉전의 희생양이 돼 1990년 한-러 수교 이전까지 귀국하지 못했고 이국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또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관계, 러시아 정부와 일본 정부의 관계 때문에 유골 봉환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 봉환은 러시아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와 사할린한인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18구의 유골은 26, 27일 이틀에 걸쳐 현지에서 발굴한 다음 화장될 예정이며 추도식도 열린다. 화장된 희생자들의 유골은 28일 국내로 봉환된 다음 29일 충남 천안시 망향의 동산에서 추도식을 가진 뒤 납골당에 안치된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사할린#강제동원#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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