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스토리텔링 in 서울]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유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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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군 양성 조선 훈련도감 터, 일제강점뒤 운동장으로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굴한 서울성곽의 모습(왼쪽 위). 조선시대 하도감터(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였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지어진 뒤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모습을 바꾸며 한국 스포츠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시 제공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굴한 서울성곽의 모습(왼쪽 위). 조선시대 하도감터(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였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지어진 뒤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모습을 바꾸며 한국 스포츠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시 제공
요즘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의 함성이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3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열기의 주역은 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자리의 옛 동대문운동장(당시 서울운동장)이었다. 1982년 3월 27일 개막전을 시작으로 그해 10월 11일 김유동(OB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6차전 역전 만루홈런까지 프로야구 첫 역사가 여기에서 시작됐다.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는 본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분원인 하도감(下都監)이 있던 곳이다. 훈련도감은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이며, 하도감은 왕의 시위대를 운영하고 어릴 때부터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군인 별기군을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군사시설이 빈 터로 변하자 일제는 1925년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지었다. 외적을 막기 위해 군사 훈련을 하던 자리를 ‘놀이터’로 만들었으니 의도가 참으로 불순하다. 광복 이후 이곳은 우리나라 스포츠의 본거지로 자리를 잡았다.

이름이 서울운동장으로 바뀌면서 1970년대 고교야구의 숱한 명승부가 이곳에서 펼쳐졌고,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쓰여 한국 축구의 성지로 불리기도 했다.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차츰 기능을 잃어가다가 2008년에 완전히 철거됐다.

서울시민과 함께 울고 웃었던 동대문운동장은 마지막 순간 뜻밖의 선물을 남겼다. 운동장을 헐자 그 밑바닥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 도심 내에선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알았던 서울성곽, 남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성 바깥쪽으로 내보내기 위한 두 칸짜리 수문인 이간수문, 문헌으로만 알려졌던 치성(雉城·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벽) 등이 발견됐다.

지금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가면 동대문운동장의 기억을 잠시나마 되새길 수 있다. 공원 내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는 경성운동장 시절부터 이어진 운동장의 모습은 물론이고 운동장을 거쳐 간 수많은 체육인들, 과거 다양한 행사와 마지막 풍물시장 모습까지 이곳에 얽힌 수많은 삶들을 엿볼 수 있다.

동대문역사관에는 또 조선백자, 분청사기 등을 포함해 운동장 터에서 발굴된 생활 유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야외에 조성된 유구전시장에서는 하도감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는 다음 달 10일까지 매주 토·일요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야외무대에서 전통무예 창작 이야기극 ‘하도감 이생전’을 무료로 선보인다. 주인공 이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동대문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선 후기의 무예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기술된 전통무예 동작도 감상할 수 있다.

26일에는 ‘아티스트와 함께하는 한양도성 스토리텔링 투어’를 동대문 일대에서 즐길 수 있다. 낙산 성곽길을 따라 흥인지문으로 내려와 이간수문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걷는다. 시 관광정책과 02-2133-2817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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