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성 뚫고… 평화를 그리다
영국작가 등 벌써 섬 곳곳서 전시회… 비경 즐기며 ‘전쟁과 평화’ 감상
인천 연안부두에서 뱃길로 네 시간 거리인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 북한 접경지역인 서해 5도서에서는 1999∼2010년 국지전 형태의 남북 대결이 다섯 차례 벌어졌다. 제1·2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이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학살에 대한 망각도 학살의 일부”라고 꼬집었다. 전쟁과 학살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한 무리의 예술가들이 25일 3박 4일 일정으로 백령도를 찾았다. 2주 전 1진 30명에 이어 40여 명이 인천문화재단 산하 인천아트플랫폼 주최의 ‘2013 평화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백령도 탐방에 나선 것.
화가, 설치미술가, 행위예술가 등 미술계통 예술가인 이들은 북한 장산곶이 바라다 보이는 심청각,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천안함 승조원 46명의 영령을 기린 ‘46용사 위령탑’, 통일염원탑을 돌아봤다.
또 기암절벽의 두무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콩돌해안과 사곶 천연비행장도 들렀다. 천혜 절경과 역사 흔적을 간직한 탐방코스를 돈 뒤 몇몇 예술가는 주민 인터뷰에 나섰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해병대 7기 출신의 80대 노병, 평생 백령도를 떠나지 않은 70, 80대 할머니, 초등학교 출신의 70대 백령도 향토연구가 등 다양한 경력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할머니는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라는 노랫말의 민요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 행위예술가 이수영 씨(46)는 이 할머니의 육성이 담긴 민요가락을 녹음하기 위해 비 오는 날 막걸리를 사들고 가는 정성을 쏟았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상당수는 4월에도 백령도를 누비고 다녔다. 독일 영국 일본 등 해외에서 온 미술작가, 패션니스트들도 포함돼 있다. 백령도 주민들은 노란색 머리칼에 선글라스를 낀 특이한 복장의 외국인을 만나도 어색하지 않다. 국내외 예술인들이 이 섬(백령면 진촌리) 중심부의 단독주택을 개조한 예술공간 ‘평화예술 레지던스’에 자주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3월부터 이곳에서 지냈던 영국 작가 에마 벨(31)은 28일부터 2주간 백령도를 소재로 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7월 27일부터 10월 6일까지 진행될 ‘2013 평화미술프로젝트’ 특별기획전의 서막이다.
70여 명의 예술인이 ‘백령도, 60년 525,600시간의 인터뷰’라는 부제가 달린 이 특별기획전에 참가한다.
이 특별기획전은 심청각, 대피소, 군부대, 성당, 부두 등 백령도 여러 지역과 인천아트플랫폼, 송도국제도시 트라이볼 전시관 인천 도심에서 3개월간 동시에 펼쳐진다. 사진, 미술작품 등이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백령도 내 식당, 담벼락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4년 전 대전에서 백령도로 이사 온 식당 주인은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벽면에 멋진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청했다.
예술가들에게 ‘전쟁과 평화’에 대한 시각과 작품 구상을 백령도 현지에서 물어봤다.
#1 행위예술가 이수영(46)
그는 생활과 예술을 분리하지 않는다. 섬 탐방을 하면서도 관광객과 주민들이 나타나면 수시로 퍼포먼스를 한다. 날개 달린, 검거나 흰 의복에 맞춰 화살이나 해골을 들고 다니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별전 때 해병대원, 백령도 어린이들과 함께 선보일 퍼포먼스를 만들고 있다. 그는 “공포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기보다 백령도 정취에 빠져 이를 즐기면서 관심을 쏟는 게 평화”라고 강조한다.
#2 설치미술가 차기율(51·인천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비무장지대에 설치됐던 대북 홍보용 확성기를 예술품 소재로 보유하고 있다. 스피커 30개에 증폭기가 달린 무게 150kg의 이 구조물은 2005년 독일 베를린에서도 전시된 바 있다. 차 작가는 남은 8개 중 2개를 백령도 경치 좋은 곳의 양쪽에 설치한 뒤 무지개다리로 연결하려 한다. 서로 헐뜯지 않게 스피커 머리를 마주 대하지 않게 하고 꿈의 다리로 통일을 기원한다.
#3 영상미디어작가 김태은(41)
섬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백령도 주민 4명과 섬을 잘 모르는 육지 생활인 4명의 인터뷰 장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 중이다. 미리 편지로 질문을 한 뒤 동영상 촬영을 하고, 섬과 육지 사람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유성펜 등으로 철판에 새겨 바닷물에 부식시킨다. 소금에 철판이 부식되면 몇몇 글씨도 사라질 수 있어 소통되지 않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들 작품과 다큐멘터리 영상물은 7월 중순경 영국 런던에도 전시된다.
○ 백령도 가는 길
쾌속선 3척이 하루 세 차례 인천 연안부두∼백령도를 오간다. 출항시간은 오전 8시, 8시 50분, 오후 1시 등인데 기상 상태에 따라 출항시간이 수시로 바뀐다. 3시간 반에서 4시간 걸리며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편도 6만2500∼6만6500원. 백령도는 국내 여덟 번째로 큰 섬으로 섬 순환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032-88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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