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여기는 신문박물관]한성순보와 한성주보, 개화기 선진문물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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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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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꼽히는 한성순보 제3호(왼쪽)와 한성주보 제1호의 표지.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조선의 개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문박물관 제공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꼽히는 한성순보 제3호(왼쪽)와 한성주보 제1호의 표지.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조선의 개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문박물관 제공
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에는 새로운 소식을 매일 알린다는 의미로 한자 ‘일(日)’자가 있습니다.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는 며칠에 한 번씩 새로운 소식을 전했을까요? 제호에 열흘을 뜻하는 ‘순(旬)’, 1주일을 뜻하는 ‘주(周)’자가 있으니 각각 열흘이나 일주일에 한 번 발행하는 신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죠.

한성순보는 통리아문 박문국이 1883년에 창간해서 관보(官報) 형태로 발행했던 신문입니다.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낙후된 국력을 신장해야겠다고 느낀 박영효(朴泳孝·1861∼1939) 일행이 창간을 주도했습니다. 기사는 전체가 순한문이었습니다. 제1호는 18쪽으로 시작해 제5호부터는 24쪽으로 늘어났습니다. 외형은 잡지와 같은 형태였습니다.

국내 소식보다는 국외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컸다는 점에서 국제계몽에 초점을 맞췄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10호에 실린 지구환일도(地球(원,환)日圖)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동안에 4계절이 생기는 과학적 원리를 그림과 함께 설명합니다. 한성순보는 창간 이듬해인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박문국 사옥과 인쇄시설이 모두 불에 타버려 발행이 중단됐습니다.

신문 발간의 필요성이 거론되자 통리아문의 김윤식(金允植·1835∼1922)을 중심으로 속간을 추진했습니다. 한성순보를 복간하는 형태로 1886년 1월 25일 최초의 주간신문인 한성주보를 만들었습니다. 일주일 단위라서 제호 역시 한성주보로 바꿨지만 발행기관과 목적이 한성순보와 같았습니다.

형식과 내용 역시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한성순보와는 달리 한문기사 외에 국한문혼용, 때로는 순한글 기사도 실었습니다. 한문을 모르는 백성도 일부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국민계몽에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 제4호(1886년 2월 22일자)부터는 상업광고를 실었습니다. 독일의 무역회사 세창양행이 광고주인데,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성주보는 창간 2년 6개월 만에 박문국의 폐쇄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두 신문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정부의 시정방침과 지방의 상황, 물가 동향을 폭 넓게 다뤘습니다. 매호 3000부 정도 발행했는데,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부수입니다. 이렇게 많이 인쇄한 이유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고위 관리와 지식층은 물론이고 외국인에게 배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두 신문은 조선의 개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립신문과 같은 민간신문의 발전에 밑거름이 됐습니다. 정부가 발간한 관보이자 최초의 신문으로서 언론사에 독보적인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가 유실됐지만 남아 있는 지면만으로도 당시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최원경 신문박물관 연구원
#동아일보#한성순보#한성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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