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주려고 값싼 빵 먹인 것 회개… 진정한 봉사에 눈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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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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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년만의 추석 귀성’ 볼리비아 선교 서성덕 목사

서성덕 목사(오른쪽)가 2010년 1월 볼리비아 수재 현장을 방문해 수재민에게 담요를 나눠 주고 있다. 서 목사는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리면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현지인들을 위한 급식과 학교 건립 등의 봉사활동을 24년째 계속하고 있다. 서성덕 목사 제공
서성덕 목사(오른쪽)가 2010년 1월 볼리비아 수재 현장을 방문해 수재민에게 담요를 나눠 주고 있다. 서 목사는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리면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현지인들을 위한 급식과 학교 건립 등의 봉사활동을 24년째 계속하고 있다. 서성덕 목사 제공
1989년 선교하러 볼리비아로 건너간 서성덕 목사(54)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나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곤 했다. 특히 2009년 볼리비아 아이들에게 한국을 보여주러 잠시 방문한 뒤 향수병을 부쩍 심하게 앓았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중년의 나이에 눈물도 흘렸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3년 만인 9월 초 서 목사, 윤해점 선교사(50) 부부는 다시 고국을 찾았다. 부부는 비싼 비행기 요금 때문에 업무가 아니면 한국을 찾지 않다 보니 24년 동안 명절을 모두 볼리비아에서 보냈다. 서 목사 다섯 남매는 24년 만에 큰누나 집에 모여 송편을 나눠 먹으며 추석을 보냈다. 향수병을 앓던 서 목사는 소소한 행복에 감격했다. 그는 “몸과 마음이 편하긴 한데 그럴수록 볼리비아에 두고 온 가난한 아이들이 더 생각난다”고 했다.

서 목사도 물로 배를 채우던 가난한 소년이었다. 1958년 대구에서 셋째로 태어난 그는 탄광 일을 시작한 아버지를 따라 강원 영월군에서 컸다. 하루는 밖에서 놀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외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렸다. 투정에 지친 외할머니는 “집에 가면 끓여놓은 죽이 있으니 다 먹어라”라고 했다. 한달음에 집으로 가 보니 상 위에는 하얀 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는데 꿀맛 같았다”고 한다. 나중에 외할머니가 창호지 붙이려고 둔 풀을 찾기 전까지 진짜 죽인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다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야간 상고에 진학해 하루 2시간씩 자며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생활을 했다. 가난했기에 가난의 아픔을 더 잘 알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 가난한 곳에서 그들과 함께 개척해 보겠다”고 기도했다.

신학교에서 아내를 만났다. 2년 선배였던 윤 선교사는 가난한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꿈을 꿨다. 서 목사는 1989년 2월 전세금과 결혼 예물을 판 돈으로 미국, 브라질을 거쳐 선배가 선교하는 볼리비아로 건너갔다. 교회 설립, 가난 구제, 자립 기반 제공, 학교와 병원 설립 등 다섯 가지 목표를 가슴에 품었다. 그해 12월 아내도 생후 7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건너왔다.

1990년 부부는 아침을 굶는 아이들에게 빵과 죽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아이들에게 아침을 줄 욕심에 시장에서 가장 싼 빵을 사서 먹였다. 1991년 태어난 둘째 아들이 집에서 아침을 먹는 볼리비아 아이들 또래로 자랐을 때였다. 서 목사는 “‘볼리비아 아이들에게 준 맛없는 빵을 내 아이한테 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자 멋모르고 베풀었다는 걸 깨달았다”며 “그때 새롭게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떴고, 부모의 마음으로 최고의 것만 아이들에게 주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볼리비아 현지는 물론이고 한국과 미국에서 보내준 후원금 및 볼리비아인과 함께 직접 양계장을 운영해 얻은 수익으로 경비를 충당했다.

서 목사 부부는 ‘맛없는 빵’을 먹인 걸 반성하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20명이 모여 살았다. 화장실이 하나뿐이라 불편했지만 다행히 두 아들이 볼리비아 아이들과 친형제처럼 살갑게 지냈다. 2001년에는 볼리비아인들도 살기 꺼리는 우범지역으로 이사했다. 부부는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갱생하도록 돕고 어른이 되면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려 자립할 수 있게 도왔다.

몇몇은 다시 갱단의 세계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서 목사의 선교활동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 목사 집에서 자란 아이 중에는 볼리비아 명문대에 진학하거나 교육 사업을 돕는 아이도 나왔다. 서 목사는 “후원자가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묻고 성과를 요구할 때마다 스트레스도 받지만 단 한 명이라도 새 삶을 찾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서 목사 부부는 7년여 준비 끝에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2006년 420명 정원의 콜카피루아 기독교 학교를 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최신 설비를 자랑한다. 유치원부터 고교 과정까지 편성된 이 학교는 볼리비아 부유층도 선호할 정도로 지역 명문학교로 자리 잡았다. 그는 “선교사가 세운 학교라고 하면 다들 가난한 학교를 떠올리지만 이 학교만큼은 최고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저의 얼굴도 모르면서 믿고 후원한 분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10일 볼리비아로 돌아가면 가벼운 질병에도 제때 치료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볼리비아인을 위한 병원 건립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그는 병원 건립을 ‘마지막 숙제’라고 불렀다.

서 목사는 “볼리비아로 떠날 때 ‘30년 동안 봉사하자’고 목표를 세웠는데 이제 6년 남았다”며 “30년이 지나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병원을 짓고 마지막 그 순간까지 볼리비아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서성덕 목사#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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