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고리원전 정전, 보고 말라”… 당시 발전소장이 직접 지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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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등 현장 100여명도 침묵… 문병위 前소장 보직 해임

지난달 9일 고리원자력발전소의 1호기 정전사고 당시 책임자였던 문병위 전 고리제1발전소장이 1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주제어실에 있었던 간부들에게 ‘오늘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며 은폐를 시인했다. 이에 따라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고로 인해 보고시간을 놓친 것 같다”는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발표와는 달리 고리원전 간부들이 사고 발생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 전 소장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원자력안전위원회(안전위)의 조사에서도 “내가 상부에 보고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고 윗선으로 보고는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진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수원은 보고 누락 등의 책임을 물어 이날 문 소장을 보직 해임했다. 한수원의 신속한 보직해임 결정은 위기를 부른 당사자를 위기관리실장에 임명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행태라는 비판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본보 15일자 A2면 원자력안전위 “은폐 의혹 한수원 본사 조사”


한수원 김종신 사장도 오늘 안전위 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 “오늘은 보고하지 않겠다” 털어놔


이날 문 소장은 기자에게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발전소 예방정비 기간을 맞아 사건 당일 야근을 자청했고, 오후 7시 30분부터 1시간여 동안 발전소 정문 앞 식당에서 운영실장 등 주요 간부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정전사고가 터진 오후 8시 34분에는 아직 식당에 머물러 있었으며, 현장 책임자인 발전팀장으로부터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수원 내부 규정에 따르면 정전 등 원자로에 비상상황이 터지면 사장, 발전처장 등 본사 임원들과 원자력발전본부장을 비롯해 해당 원전의 차장급 이상 전 간부들에게 일제히 자동 문자메시지(SMS)로 사고 소식을 알리도록 돼 있다. 이날 결국 고리원전으로부터 아무런 문자메시지가 오지 않은 것은 이를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을 쥔 원자력발전본부장 혹은 발전소장이 사고 소식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문 소장은 식사를 마치고 오후 9시가 조금 못 돼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고, 건물 조명이 모두 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낌새가 이상해 오후 9시경 발전소 주제어실로 간부들과 함께 찾았을 때에야 정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주제어실엔 발전팀장 등 한수원 직원 6명과 협력사 관계자들을 포함해 총 20명이 몰려 있었다. 주제어실 밖 발전기 근처에는 약 80명이 있었다.

그는 “주제어실에 들어가 보니 이미 전력이 복구돼 원전 안전의 핵심인 냉각펌프가 돌아가고 있었다”며 “발전팀장 등 근무자들은 냉각펌프를 제외한 조명 등 기타 시설의 전원을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문제의 은폐 시도가 있었던 건 바로 이때부터다. 문 소장은 운영실장과 발전팀장 등 간부들이 옆에 있던 상황에서 ‘오늘은 보고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오후 9시 20분경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따로 대책회의를 열어 입을 맞춘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원전을 책임지는 고위 간부의 발언인 만큼 사실상 은폐를 지시한 것과 다름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일개 사원이 아닌 발전소장이 말한 만큼 부하직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문 소장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애매한 답변을 했다.

[채널A 영상]사고현장 100명의 한달간 입단속, ‘끈끈한 관계’ 때문

○ 본부장 이상 윗선 정말 몰랐나


안전위는 15일 오전 9시 30분부터 낮 12시까지 문 소장을 불러 조사를 벌였다. 안전위에 따르면 문 소장은 조사에서 정전 사고가 난 뒤 “내가 상부에 보고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고 윗선으로 보고는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진술을 했다.

또 사고 당시 현장에선 조직적인 회의는 아니었지만, 고리1호기 관계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눴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 자리에서 문 소장이 “보고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의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직원들은 원전의 상황을 기록해야 하는 ‘일지’에 사고 사실을 적지 않고 ‘정상’으로 표기했다. 이 때문에 다음 날 출근한 안전위 주재관과 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직원들은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문 소장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협력사들에 소문이 퍼져 부산시의원까지 사고 소식을 접한 상황에서 문 소장의 상급자인 정영익 당시 고리원자력본부장 혼자 몰랐다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고리원전에는 예방정비 기간을 맞아 협력사까지 총 1000명의 인원이 투입돼 있었으며, 당시 사고 현장에만 100명이 일하고 있었다. 한수원 측 주장은 원자력본부장조차 관련 사실을 몰라 본사는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전위 관계자는 “조사를 통해 원자력안전법이나 방재대책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며 “형사처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윤미 동아사이언스 기자 ym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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