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광원 136명 삼킨 그 바다에… 눈물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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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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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때 강제노역 ‘조세이 탄광’ 수몰 70주기 추모제

일본 야마구치 현 니시키와 해역에는 일제강점기 조세이 해저탄광으로 끌려갔다가 붕괴
사고로 수몰된 조선인 136명이 아직 묻혀 있다. 사진은 2007년 해저탄광으로 연결되는
환기구(점선 안)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희생자 유족이 합동제사를 지내는 모습.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제공
일본 야마구치 현 니시키와 해역에는 일제강점기 조세이 해저탄광으로 끌려갔다가 붕괴 사고로 수몰된 조선인 136명이 아직 묻혀 있다. 사진은 2007년 해저탄광으로 연결되는 환기구(점선 안)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희생자 유족이 합동제사를 지내는 모습.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제공
“그 추운 바닷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외롭소.”

5일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 우베(宇部) 시 니시키와(西岐波) 바닷가에 4명의 한국인이 섰다. 백발이 성성한 이들은 잔잔한 겨울바다를 향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들은 70년 전인 1942년 2월 3일 붕괴된 조세이(長生) 탄광의 조선인 희생자 유가족들. 당시 일본 최대 해저탄광이었던 조세이 탄광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광원 183명을 그대로 삼켰다. 법으로 채탄이 금지된 위험지역으로 이미 여러 차례 붕괴 가능성이 경고됐지만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원 확보가 시급해진 일본 정부가 무리하게 조업을 벌이다 사고가 난 것.

특히 전체 희생자 중 136명은 일본으로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였다. 이들은 평소 키보다 높은 울타리로 에워싸인 숙소에 감금된 채 밤낮으로 채탄 작업을 벌이다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이국 바다에 묻혔다. 사고 이후 탄광 측은 유족들에게 위패와 소정의 위로금만 전달했고 조선인 희생자들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탄광 사고의 악몽이 물 밖으로 드러난 것은 2006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동아일보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면서부터다.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도 조선인 희생자 유가족 달래기에 힘을 보탰다. ‘조세이 탄광 물 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회장 야마구치 다케노부·山口武信)은 3년 전 십시일반으로 모금을 시작해 유족들이 합동 추모제를 지낼 수 있도록 바닷가 인근의 터를 사들였다. ‘물 비상(非常)’이란 수몰 사고가 발생했다는 일본 은어. 김형수 장생탄광희생자유족회장은 “해저탄광의 환기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마저 탄광 소유주 후손의 땅이라 그동안 마음대로 못했다”며 “일본인들의 모금 덕에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야마구치 회장(82)은 “한국인 희생자와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에 추모비도 함께 세우고 싶었지만 2억 원의 비용을 아직 모두 모금하지 못했다”며 “반드시 힘을 모아 돌아가신 조선인의 한국 이름을 새긴 추모비를 세우고 이들의 영혼을 달래 드리겠다”고 했다.

동아일보 2006년 4월 22일자 3면.
동아일보 2006년 4월 22일자 3면.
이날 일본인들이 선물한 터에서 70주기 합동 추모제를 지낸 유족들은 “육지도 이토록 추운데 저 찬 바닷속은 오죽하겠느냐”며 “너무 추워 시신이 아직 썩지도 못했을 것 같다”고 오열했다. 이들은 제사를 마친 뒤 굴뚝까지 배를 타고 가서 헌화하는 것으로 추모식을 마무리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측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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