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남해 및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돼 다음 해 2월 11일 장례를 치른 뒤 금성산에 안장됐다. 그리고 (전사 후 16년, 장례 후 15년 뒤인) 1614년 현재의 어라산 묘소로 이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최근 펴낸 이순신연구논총에 홍순승 충남도교육청 장학관이 기고한 논문 ‘이순신 장례과정 연구’의 첫 머리이다. 그가 논문 첫 머리에 이를 기록한 것은 충무공의 죽음과 장례를 둘러싼 무수한 이론(異論) 때문이다.
그가 이번 논문에서 바로잡고자 한 것은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16년간 숨어 살다 타계했다는 ‘충무공 은둔설’이다. 홍 장학관은 “은둔설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으면 왜 장례가 84일 만에 이뤄졌느냐는 의문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당시 장례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은둔설이 학계의 정설도 아닌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믿고 있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장례가 84일 만에 열렸을까. 논문은 충무공이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三月而葬)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첫 묏자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참모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잡았다.
홍 장학관은 “이 충무공이 사후 새롭게 평가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고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이 ‘첫 장례가 전란 직후라 예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치러졌다’며 조정에 이장을 상소해 첫 장례(1599년 2월 11일)가 이뤄진 지 15년 후인 1614년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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