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사태 100일]<下>“속수무책 그만”… 매뉴얼-시스템 다 바꾼다

  • Array
  • 입력 2011년 3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축사 차량 출입기록 의무화… 농가 단위로 매뉴얼 다시 짠다

구제역 발생 100일을 맞아 동아일보가 농장주, 공무원, 전문가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현행 구제역 매뉴얼의 문제점으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구제역 대규모 확산 시 대응방안 미흡’(58.0%)과 ‘매몰지 선정 및 매몰 절차에 대한 세부지침 부족’(16.0%)이었다.

사상 최악의 피해를 본 이번 구제역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농림수산식품부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정하고 현행 매뉴얼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에 착수했다. 정부는 구체적인 대응 매뉴얼 마련과 근본적인 축산 시스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매뉴얼, 개별 농가 단위 지침까지

유정복 농식품부 장관은 최근 축산 관련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수첩과 펜을 챙긴다. 유 장관은 “현행 매뉴얼은 대규모 구제역 발생 시 대응방안과 이동 통제, 소독 방법 등 개별 농가 단위의 방역활동에 대한 지침이 부족했다”며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많이 듣고 이를 보완한 매뉴얼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 방역당국의 역량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구제역 등 가축질병 발생 시 즉각 투입할 수 있는 ‘긴급방역단’도 구성하기로 했다. 긴급방역단은 농식품부, 수의과학검역원 관계자는 물론이고 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지방수의사로 구성된다. 이와 함께 경기 파주시의 분뇨차량이 최초 구제역 발생 농장을 출입한 사실을 놓친 것과 같은 결정적인 실수를 막기 위해 모든 농가에 차량 출입기록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행 지방자치단체 축산연구기관의 능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검역검사청’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구제역이 종식되더라도 백신 접종은 계속 실시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구제역 백신을 맞은 소와 돼지는 구제역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며 “향후 2∼3년간 지속적인 백신 접종이 불가피한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축산 시스템 전면 개편

또 정부는 이번 구제역을 계기로 현재의 축산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기로 하고 세부적인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동아일보의 설문조사에서는 향후 과제로 ‘밀집 사육 등 전근대적 가축 사육환경 개선’(24.0%)을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정승 농식품부 2차관은 “사육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구제역은 언제고 재발할 수 있다”며 “친환경 자원순환형 축산 시스템을 갖추도록 축산업 허가제 및 쿼터제(총량할당제) 등을 포함한 제도 개선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대규모 기업형 축산농장을 대상으로 방역 및 분뇨 처리 능력을 고려해 사육 규모를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사육환경 시설 개선을 위해 정부가 2∼3%대의 낮은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제도도 도입할 예정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모든 것을 연내에 마무리짓고 내년부터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10년전 악몽 겪은 英… 10년만에 홍역 치른 日 ▼


2001년 2월 19일 영국 잉글랜드 에식스 주의 한 도축장. 도축 대기 중이던 돼지의 입과 발에서 구제역 증상이 나타났다. 9개월 동안 646만 마리의 소, 돼지, 양이 도살처분되는 영국 사상 최악의 구제역 사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튿날 오후 바이러스 양성 판정이 나왔으나 영국 농식품부는 3일이 더 지난 뒤에야 가축 이동제한 조치를 내렸다. 이미 전국 각지로 이동 중이던 가축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냥 뒀다. 군 병력이 도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것은 발병 후 한 달이 지난 3월 19일이었다.

3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한 주에만 최고 300건의 구제역이 확인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대가는 혹독했다. 도살처분으로 가축을 잃은 농장은 무려 1만167곳이나 돼 정부 보상금과 방역비만 28억 파운드(5조535억 원)에 이르렀다. 농업생산 피해액도 9억 파운드(1조6243억 원)에 달했다.

○ 늦었던 초동 대처, 빨랐던 발병 확산

구제역 파동 초기, 영국 정부는 백신접종 여부와 대상을 판단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끌었고, 뒤늦게 마련된 백신접종 프로그램도 수의사 등의 지원 미비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10곳 미만의 지역에서 구제역이 발병했을 경우’를 전제로 한 위기관리 지침도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첫 구제역 발병 판정이 나기 전 50여 마리의 소와 돼지 등이 감염됐을 정도로 구제역이 널리 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육류 수출입이 활발한 유럽은 전통적으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꺼린다. 그 대신 구제역에 감염된 가축뿐 아니라 발병지로부터 일정한 반경 내의 소, 돼지, 양 등을 미리 도살처분하는 것을 선호한다. 당시 영국은 대규모 매립장에 도살처분해 매몰한 가축 사체를 다시 발굴해 소각했다. 매립된 가축 사체는 최대 10년이 지나면 대부분 분해되지만 침출수는 20년 이상 발생하면서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 사전 준비와 사후 관리 철저

전대미문의 대규모 도살처분은 커다란 후폭풍을 몰고 왔다. 도살처분을 지켜본 영국 국민은 물론이고 유럽연합(EU) 주민 사이에서 동물 복지, 환경, 축산업자와 도살처분에 동원된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져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뒤늦게 축산행정의 총체적 검토 필요성을 깨달은 영국 정부는 2001년 8월 ‘구제역 교훈위원회’ ‘가축전염병에 대한 학술원 조사위원회’ ‘영농 식품 미래 정책위원회’를 잇달아 설치했다. 이후 이 위원회들은 축산업의 선진화, 동물의 건강과 복지, 농업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 등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특히 영국 정부는 매립지에 대한 조사를 벌여 가축 사체에서 흘러나온 침출수 안에 살모넬라 등의 병원균과 메탄가스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조사 결과를 근거로 환경식품농무부는 이후 구제역 가축 사체 처리의 우선순위를 상업용 고정소각시설에서 소각, 멸균 처리, 허가된 상업용 매립지에 매립 순으로 정했다. 매몰과 이동소각시설에서의 소각은 이들 세 가지 사체 처리 방법이 한계에 달했을 때만 이용하도록 했다.

○ 일본의 대응 매뉴얼은

일본도 지난해 4월 10년 만에 규슈(九州) 남쪽 미야자키(宮崎) 현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큰 피해가 나는 등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발생에서 종식까지 4개월여 동안 도살처분된 가축 수와 피해액은 한국과 대조적이다. 이 기간에 일본에서 도살처분된 소와 돼지는 약 32만 마리, 피해액은 2350억 엔(약 3조1300억 원)이다. 반면 한국은 구제역 발생 100일 동안 346만 마리가 도살처분됐고 간접 피해액까지 합치면 6조 원으로 추산된다.

비슷한 시기에 도살처분된 가축 수가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한국이 구제역 발생지로부터 일정 거리 이내에 있는 소 돼지를 도살하는 예방적 도살처분을 의무화하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구제역이 발생한 농가의 가축만 도살처분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은 도살처분한 가축을 묻을 매몰지가 확보되지 않으면 함부로 도살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하수나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주지 않는 땅을 엄선해 묻어야 한다.

일본의 축산농가가 몰려 있지 않고 구제역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사료공급체계나 분뇨처리 시스템이 분산돼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지난해 일본의 구제역 발생지는 미야자키 현으로 국한됐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 청정지역 지켜낸 전남-전북-제주 “이렇게 막았다” ▼
전남, 사육밀도 낮춘 ‘친환경 축산’의 힘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서 ‘청보리 한우농장’을 운영하는 유경환 씨가 축사에서 암소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영광=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서 ‘청보리 한우농장’을 운영하는 유경환 씨가 축사에서 암소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영광=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 영광군 법성면 ‘청보리 한우농장’은 농림수산식품부가 인증한 ‘환경친화축산농장’ 1호다. 농장은 마을에서 200∼300m 떨어진 언덕 위에 있다. 소를 최대한 주민과 격리해 각종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미생물과 수분이 함유된 짚 위에서 450여 마리가 편히 쉬고 있다. 축사 지붕은 햇빛이 들고 환기가 잘되도록 개폐식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소 옆에 가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농장주 유경환 씨(55)는 2003년부터 동물 복지 개념을 도입한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친환경에 대해 많은 사람이 무관심하던 때였지만 자연 속에서 풀을 뜯으며 건강하게 자라는 소를 키우고 싶었다. 초지 면적(13만8600m²·약 4만2000평)이 축사 면적(1만1000m²·약 3300평)의 10배가 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초지는 순환방목을 위해 11개 구간으로 나눠 암소들을 3일 간격으로 방목한다. 축사도 소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마리당 최소 9.9m²(약 3평) 이상의 면적을 확보했다. 유 씨는 “친환경 축산만이 농가가 살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경북 안동시에서 시작된 구제역이 전국적인 재난상황을 초래했으나 전남북과 제주에선 구제역 청정화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 이들 지역이 청정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는 발 빠른 초동 대응과 사육환경 개선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3만7000여 농가에서 소와 돼지를 키우고 있는 전남은 2006년부터 가축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사육환경을 개선했다. 축사에 방목장을 만들고 소와 돼지가 좁은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적정한 사육 밀도를 유지하는 등 친환경 축산 정책을 장려했다. 현재 전남지역 친환경축산물 인증 농가는 2028농가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충남, 경남북과 경계인 전북도도 초기부터 철저하게 대응한 효과를 봤다. 2003, 2006, 2008년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해 큰 피해를 봤던 터라 필사적으로 방역작업에 매달렸다. 다른 시도에서 유입되는 모든 축산 차량을 소독하고 확인증을 발급했다.

제주는 국경 검역 수준에 준하는 방역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제주공항과 제주항에 발판소독 외에도 에어샤워기, 자외선소독기, 축산업 관련 개인소독기 등을 추가로 설치하는 등 방역을 강화했다. 구제역 발생 다음 날부터 다른 시도 가축 고기 사료 등의 반입을 전면 금지했다.

영광=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주=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