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김정철처럼…’ 김정일大 출신 본보기자가 본 에릭 클랩턴 내한공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2월 21일 10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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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보다 강한 블루스 선율, 평양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에릭 클랩턴의 세 번째 내한공연은 관객 1만2000명의 환호 속에 막을 내렸다. 20일 저녁 서울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기타의 신'이 두 시간 동안 선물한 마법에 푹 빠져버린 관객들은 막이 내린 뒤에도 아쉬워하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14일 두 개의 국경을 넘어 싱가포르의 클랩턴 공연장을 찾았던 북한 독재자의 차남 김정철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음악마저 이념의 종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최악의 독재국가에 클랩턴의 광팬이 있다는 것은 부조화의 극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던 기자에게 북한과 팝송의 조합은 어색하지 않다. 독재와 굶주림, 세뇌된 열광이라는 북한 외양의 이면에는 인간 본연의 감성이 죽지 않고 꿈틀대고 있다. 북한에서 기타를 칠 줄 아는 사람은 아마 한국보다 많을 것이다. 저녁 무렵 경제난으로 암흑이 된 북한의 어느 마을을 지나가도 어둠 속 어디선가 기타의 선율을 들을 수 있다. 그 선율은 북한TV를 지배하는 광적인 선동 음악과는 다르다.
기타 3개로 17곡 연주20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세 번째 내한 공연을 가진 에릭 클랩턴(66). ‘키 투 더 하이웨이’에서 ‘원더풀 투나잇’까지 2시간여 동안 기타 3개로 17곡을 연주하고 노래한 뒤 앙코르 곡으로 ‘퍼더 온 업 더 로드’를 선사했다. 연합뉴스
기타 3개로 17곡 연주
20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세 번째 내한 공연을 가진 에릭 클랩턴(66). ‘키 투 더 하이웨이’에서 ‘원더풀 투나잇’까지 2시간여 동안 기타 3개로 17곡을 연주하고 노래한 뒤 앙코르 곡으로 ‘퍼더 온 업 더 로드’를 선사했다. 연합뉴스

기자도 팝송에 얽힌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대학 시절, 깊은 밤 머리맡 녹음기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던 '어 타임 포 어스(A time for us)', '디 엔드 오브 더 월드(The end of the world)'는 기숙사생의 굶주린 잠자리를 위로해 주었다. 김일성 광장의 충성맹세 모임에 나갔다 돌아온 저녁에도, 자본주의 바람을 없애자는 강연을 듣고 내려 온 저녁에도 빠짐없이 팝송을 들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에서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의 테이프가 비밀리에 퍼질 때 주제곡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이 누렸던 인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에게 이 노래들은 자본주의나 제국주의와 무관한 단지 감미로운 음악이었을 뿐이다. 그게 벌써 10여 년 전이다. 당시엔 녹음기도 잘사는 집에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양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MP3 플레이어를 갖고 있다. 이미 당국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간부들도 김일성대를 다니며 팝송을 좋아했던 기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모두 정신적 일탈을 꿈꾸고 있다. 꿈으로만 그치는 일탈을 김정철은 실현했을 뿐이다. 서방음악을 '황색바람'으로 엄중히 단속하는 북한 통치자의 아들이 가장 먼저 금지선을 뛰어넘은 것이다. 하지만 정철의 '고상한' 취미가 본인이나 아버지를 교화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김정일도 젊은 시절 정철의 어머니인 고영희와 차 안에서 밤새도록 한국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술을 마시면 러시아어와 일본어로 그 나라 명곡을 부르던 김정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군 공훈합창단에 주기적으로 찾아가 수백 명이 내지르는 광란의 찬양가를 즐긴다. 그리고 인민들에게도 그런 음악만을 강요한다. 지금은 클랩턴에 열광하는 김정철이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다.

정철은 2007년 클랩턴의 평양공연을 추진했는데 클랩턴이 거절했다고 한다. 클랩턴이 독재국가에서 공연하는 첫 유명 음악가로 기록되길 원하지 않아서라는 후문이다. 하지만 클랩턴의 공연은 평양에서 더욱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안 된다'가 아니라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음악부터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기자와 함께 이날 공연을 본 탈북 예술인은 "북한 주민들이 클랩턴의 영어 가사는 이해하지 못해도 황홀한 기타 연주 솜씨에는 분명히 빨려 들어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면서 기자는 평양 시민들과 이런 공연을 함께 즐기는 날이 하루 빨리 찾아오길 기원했다. 그런 날은 상상만 해봐도 흐뭇하다.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이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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