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칸 영화제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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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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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봐야할 영화는 ‘시’… 앗, 경쟁부문작 추천하면 안되는데”

제63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칸 영화제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칸=손택균 기자
제63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칸 영화제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칸=손택균 기자
《그의 손목시계 분침(分針)은 15분 단위로 움직이는 듯했다. 제63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50). 12일부터 열하루 동안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영화계 사람들을 일일이 맞이해야 하는 ‘잔칫집의 주인’이다. 하루 스케줄은 10분 또는 15분 단위로 촘촘하다. 비서 마리카롤린 르루아 씨가 슬쩍 보여준 일정표에는 깨알만 한 글씨가 A4 용지 2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2007년부터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영화제 기간 중 언론 인터뷰에 거의 나서지 않는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가늠케 하는 실마리로 확대 보도될 만큼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인터뷰를 거듭 요청하자 빽빽한 일정을 어렵게 쪼개 25분을 냈다. 이례적인 일이지만 한편으로 한국 영화의 힘도 느낄 수 있었다. 프레모 위원장을 19일 오후 팔레 드 페스티발 5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영화산업도 경제위기 영향 커, 거품 걷어낼 계기될것
수상작 심사는 예술의 영역… 예상할 수 없는 게 당연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대한 호감을 은연중 드러내 수상 가능성을 기대하게 했다. 다른 행사 참석 도중 인터뷰를 위해 달려온 프레모 위원장에게 “정신없어 보인다. 시간 내줘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는 “괜찮다. 대신 올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밥 한 끼 사라”며 웃었다.

“2001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부산영화제를 꾸준히 찾았다. 부산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스런 도시 중 하나다. 그곳에 갈 때면 언제나 영화제뿐 아니라 거리의 모습,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게 된다. 지난해만 딱 한 번 못 갔다.”

-급한 사정이 있었나.

“파리에서 열린 신작 영화 관련 행사에서 몸을 뺄 수 없었다. 올해는 꼭 갈 거다. 늘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의 같은 방에 묵는다. 그 건너편에 늘어선 수산물시장 안쪽 식당들과 달맞이고개의 작은 레스토랑들을 아주 좋아한다. 당신에게 유용한 정보이니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웃음)

-올해 칸 영화제는 두 가지 악재 때문에 개막 전 많은 우려를 낳았다. 하나는 아이슬란드에서 날아온 화산재, 또 하나는 글로벌 경제위기다.

“화산재가 걷히지 않았더라도 몇몇 언론의 예측 기사와 달리 영화제에는 차질이 없었을 거다. 칸 영화제는 운이 좋다. 전 세계 영화인들로부터 확고부동한 최대, 최고의 축제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반드시 와야 할 사람들은 대부분 화산재 스모그 위험이 없는 이동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다.”

-세계 경제위기가 칸 영화제를 질적, 양적으로 위축시켰다는 견해가 있는데….

“글쎄. 외형적 타격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개의 국제영화제로부터 동시에 초청을 받은 영화인은 당연히 칸을 최우선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영향을 받았다. 영화는 문화인 동시에 산업이다. 산업이 돌아가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경기가 나빠지면 다른 모든 산업과 마찬가지로 영화산업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만드는 규모와 숫자가 제한을 받으니 아무래도 영화제 분위기에 적잖이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공식 경쟁부문 초청작이 예년 21, 22편에서 19편으로 줄어든 것도 그런 영향 탓인가.

“의도적으로 줄인 게 아니다. 공식 경쟁부문 작품 숫자가 상당 기간 비슷하게 유지돼 왔지만 우리는 21, 22편을 선정한다는 원칙을 뒀던 적이 없다. 더 많았던 적도 있고 올해처럼 어쩌다 약간 줄어들 수도 있는 거다. 좋은 영화가 한 해에 몰려서 쏟아질 수도, 좀 적게 나올 수도 있지 않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이유(경제위기)로 몰아서 설명해야 할까. 또한 위기가 사실이라면 그에 대해 긍정적 마인드로 대처하면 된다. 경기침체는 반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영화제나 영화산업에서 거품을 씻어내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도록 돕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감독의 경력과 명망을 중시하는 경쟁부문 작품 선정과 수상작 심사 기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올해 감독주간 최고의 화제작인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르 꺄뜨로 볼테(Le Quattro Volte)’ 같은 수작이 경쟁부문에서 밀려난 사실 등이 그런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는데….

“모든 수작 영화가 경쟁부문에 오를 수는 없다. 작품 선정 작업은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수학문제를 푸는 일과는 다르다.”
리옹 뤼미에르영화박물관 대표이기도 한 그는 2001년 질 자콥 전임 위원장(80·현 회장)에 의해 영화제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후계자 훈련’을 받다가 2007년 직책과 실권을 넘겨받았다. 1978년부터 영화제를 이끌어온 자콥 회장은 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제작을 끝으로 실무에서 손을 뗐다. 그 뒤 프레모 위원장은 미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등의 최초 상영 이벤트를 적극 유치하며 글로벌 영화산업의 흐름과 칸 영화제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업’에 이어 올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로빈후드’를 개막작으로 내세운 것은 영화가 대중성에 기반을 둔 문화 콘텐츠임을 강조하려는 프레모 위원장의 영화제 운영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올해 공식 경쟁부문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예상이 적지 않더라.

“19개의 작품이 있고 9명의 심사위원이 있다. 심사는 완벽하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심사위원들이 영화를 볼 때는 아무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다. 그들 누구도 섣부른 예상을 입에 담지 않으며, 감히 예상할 수도 없다. 다른 심사위원들의 생각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9명의 심사위원은 모두 제각기 다른 감성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시상식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는 나 역시 결과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심사 과정은 마켓과 완전히 분리된 ‘예술’의 영역에 있다. 논쟁이 무수히 벌어진다. 당신은 예술이란 것에 대해 무엇을 ‘예상’할 수 있는가. 예상이 가능하다면, 그걸 예술이라 할 수 있겠나.”

-그냥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의 견해를 묻는다면, ‘하녀’와 ‘시’ 두 한국영화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었나.

“하하. 괜찮은 시도다. 그런 질문에 대해 절대 대답하지 않는 것이 내 가장 중요한 임무다.”(웃음)

-그럼 경쟁부문 초청작 19편을 제외한 다른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 이번 칸 영화제를 찾아온 사람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를 딱 하나만 추천한다면?

“음….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타마라 드루이’랑 이창동 감독의 ‘시’…. 앗, ‘시’는 경쟁부문이군. 취소한다.”(웃음)

-지난해 비경쟁부문 초청작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공식 갈라 상영 때 마이크를 들고 직접 행사를 진행해 화제가 됐다. 원래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성격인가.

“시선을 즐기는 게 아니라 일을 즐기는 거다. 내 직업은 영광스런 특권(privilege)이다. 나는 억세게 운 좋은 인생을 살고 있다. 1년 내내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를 마음껏 보고 그 가운데 몇몇 좋은 작품을 골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한다. 좋은 영화를 찾아내 더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는 순간의 희열은 엄청나다. 그 순간 무대 위에서 감독과 배우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고 그들의 진심 어린 회답을 듣는 일은 늘 나를 즐겁게 흥분시킨다. 또한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은 우리가 초청한 손님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 맞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칸 영화제가 대중 취향을 외면한다는 지적도 있는데….

“칸 영화제는 대중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제를 통해 대중에 요구하는 것은 뭘까. 대중의 입맛에 맞게 축제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평생 모든 것을 바쳐 이 일을 하는 목적이 아니다. ‘자, 여기 이 자리에 올해 최고의 감독들이 모였다. 최고의 영화들이 모였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다. 판단을 부탁한다.’ 그게 대중에 바치는 우리의 메시지다. 칸은 예술로서의 영화를 고민하는 축제다.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칸 영화제는 해마다 새로운 대답을 내놓으려 고민한다.”

-1968년 감독주간이 칸 영화제 본부에 반박하며 일어난 뒤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칸 영화제의 ‘노쇠’를 염려하는 시선도 있다.

“칸이 변했다기보다는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칸은 늘 변화를 추구해 왔다. 최근에는 영화산업의 현실에 보다 귀 기울이려 하고 있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기준으로 경쟁을 벌이는 일의 가치에 대해서도 늘 고민한다. 조금 거창한 얘기를 해볼까. 플래시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담은 올해 칸 영화제 포스터를 봤나. 1950년 피카소가 손전등으로 허공에 미노타우루스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에 바친 오마주다. 피카소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대중’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그냥 그의 예술을 했다. 그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 좋은 답변,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천만에. 몇 달 뒤 부산에서 만나자.”(웃음)
칸=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dongA.com에 인터뷰 전문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1989년 프랑스 리옹 뤼미에르영화박물관 예술감독
1997년 뤼미에르영화박물관 대표
2001년 칸 국제영화제 예술감독
2007년 칸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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