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승헌]고향 백령도 휘감은 바다는 ‘차가운 평화’를 잊지말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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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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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출신 기자의 1개월 취재… 다시 고향을 떠나며

軍과 함께 살아온 반세기
비극의 바다 앞 주민들 먹먹

“백령도 앞에서 군함이 침몰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11시. 수화기 너머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급히 백령도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다들 흥분해 있었다. “우리도 깜짝 놀랐어. ‘펑, 펑’ 포 소리가 들리고 바다 쪽에는 조명탄이 번쩍 떠오르더라고.” 침몰한 군함은 ‘천안함’이었다.

데스크의 지시로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고향인 백령도로 향했다. 기자는 백령도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까지 섬에서 살았다. 2004년에는 백령도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있었으니 백령도를 다시 찾은 건 6년 만이었다. 갈아입을 옷 한 벌도 챙기지 못한 채 황급히 인천에서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고향으로 취재를 간다는 설렘보다는 46명의 꽃다운 수병이 배와 함께 침몰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6년 만에 다시 밟은 백령도는 예전처럼 짙은 해무와 거센 해풍에 휘감겨 있었다. 한겨울에나 어울릴 듯한 4월의 칼바람도 여전했다. 풍경은 바뀐 게 없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어릴 적 뛰놀던 사곶 해안은 군의 통제하에 비행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해병대 장병을 태운 군용트럭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서해 최북단에 위치해 북한과 눈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이라는 게 실감났다. 이날 오후 침몰 지점이 보이는 장촌 언덕을 찾은 백령도 주민들의 표정은 근심으로 가득 찼다. 한 주민은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건 발생 후 이틀 동안은 정신없이 취재 현장을 뛰어다녔다. 동네 어른들과 형, 친척들은 모두 취재원이었고 실제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친척은 기자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했고, 해덕호 선장은 함미의 위치를 처음 알려주기도 했다. 사건 3일 만에 취재지원선을 타고 침몰 해역으로 갈 수 있었다. 고장 난 차를 버리고 오토바이를 빌려 용기포 해안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배에 올라탔다. 초속 15m 해풍에 몸이 휘청거렸고 배를 덮친 파도에 온몸이 흠뻑 젖기도 했다. 그만큼 백령도 바다는 거칠었다. 이런 바다 밑에 우리 수병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했다.

함미가 인양된 15일. 주민들은 천안함 침몰 해역이 보이는 용틀임바위 전망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 동강 난 함미가 모습을 드러내자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주민들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렀다. 백령도 주민 임봉익 할아버지(82)는 “백령도 바다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곳”이라면서 “장병들이 꼭 살아 돌아오길 바랐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임 씨는 눈물을 닦으며 빛바랜 스웨터를 벗어 왼쪽 겨드랑이의 검붉은 흉터를 보여줬다. 두 발의 총알이 관통한 자리였다. 황해도 장연군 출신의 임 씨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대항해 조직됐던 백령도의 민간 의용군, ‘동키(Donkey)부대’ 대원이었다.

백령도는 거센 해풍 속에서도 군과 주민이 일치단결해 반세기가 넘도록 서해 최북단을 꿋꿋이 지켜왔다. 백령도는 주민과 군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섬이다. 군인들은 농번기마다 들판에 나가 주민들을 도왔다. 버스가 없던 어린 시절 유일한 시내버스는 군용 버스였다. 섬에 하나뿐인 고등학교인 백령종합고에 남아 있는 농구 골대도 15년 전 군이 세워줬다. 주민들도 군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생업을 제쳐두고 달려갔다. 이 때문에 천안함이 침몰하자 주민들은 “자식 같은 군인들이 당한 일”이라며 만사를 제치고 군과 인양업체를 도왔다. 장촌 포구에서는 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어선들이 수시로 출항했다. 주부들은 해병대원들에게 어묵과 떡을 날랐다. 112년 역사의 중화동 교회에서는 매일 오전 5시마다 천안함 수병들의 귀환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함수 인양이 마무리돼 평택 제2함대로 떠난 25일 주민들은 용틀임 전망대에 모여 위령제를 지내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기자도 한 달간의 취재를 마치고 25일 오전 8시 백령도를 떠나는 배를 타고 나왔다. 함수 인양작업을 지켜보던 백령도 주민 오세훈 할아버지(80)가 한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이 바다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극적인 일을 만들어 냈어….”

박승헌 사회부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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