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군대 보냈으면 나라의 아들… 군인답게 보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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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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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장례위원장 맡은 故나현민 일병 아버지 나재봉씨”

중요한 순간마다 결단 내려준
‘천안함 가족’ 모두 이성적인 분들

실종 여덟명 가족 보면 억장 무너져
‘귀환자’ 명의로 ‘귀환소망’ 현수막

각자 돌아가서 느낄 ‘빈자리’
지금보다 그때가 더 힘들 것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 나재봉 장례위원장이 아들 나현민 일병 얘기를 하다 잠시 감정이 북받친 듯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평택=강경석 기자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 나재봉 장례위원장이 아들 나현민 일병 얘기를 하다 잠시 감정이 북받친 듯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평택=강경석 기자
“우리 애가 32번째로 나왔잖아요. 25번째까지는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가족들에게 곧 이름을 부를 거라고 위로했죠. 그러나 26번째가 되니까 저도 참 견디기 힘들더군요.” 천안함 승조원이었던 고 나현민 일병(20)의 아버지 나재봉 씨(52)는 인양된 함미에서 시신이 차례로 수습되던 15일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의 실종자 가족 상황실에서 초조하게 아들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종자가족협의회’ 대표단의 일원이어서 다른 가족들을 위로하느라 더 신경을 썼지만 저녁 늦게 아들의 시신이 수습되기까지 나 씨에겐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3주가 넘게 이곳을 지키며 장례위원장을 맡고 있는 나 씨는 18일에도 분주했다. 앞으로 치러야 할 장례 준비로 다른 가족들과 의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씨를 18일 오후 2함대사 내 해군회관에서 만났다.

―천안함 침몰 이후 가족들이 여러 번 결단을 내렸습니다.

“참 지적인 분들이에요. 인양 건도 그렇고, 수색 포기 건도 그렇고. 함미를 이동시키기로 했을 때 오후 2시 15분에 전화가 왔는데, 오후 2시 52분에 동의해 줬습니다. 20, 30분밖에 안 걸렸어요. 빨리 결정해 줘서 가족들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수색 중단을 요청했는데 시신을 못 찾은 가족들은 끝까지 찾아봤으면 하지 않겠습니까.

“독도함에서 전화 연락이 와서 (시신이 발견됐다고) 번호를 불러줄 때 주위에서 하는 말이 ‘축하합니다’였습니다. 김태석 상사가 일찍이 귀환했을 때는 축하한다고 술도 한잔 먹었습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수병은) 산화자 처리하자는 것도 여러 차례 논의했어요. 외부의 피격으로 인해서 발생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에 가족들이 전반적으로 잘 동의해 주셨습니다.”

―구조작업을 하던 한주호 준위가 순직하면서 수색작업을 중단하고 인양을 해달라고 첫 결단을 내렸는데 그때는 어땠습니까.

“그때는 백령도 해상에 가 있었어요. 처음으로 초계함 안도 봤는데 안의 구조가 반파 됐을 때엔 전기선, 호스, 각종 부유물 때문에 구조대원들도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이틀쯤 지나서 어느 원사님한테 계급장 떼놓고 얘기해 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실제로 2인 1조가 들어가도 부유물 때문에 문 열고 진입을 못한다, 자기들도 발로 밀고 들어가더라도 수압이나 이런 거 때문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바로 나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구조를 한 사람씩 하려다 보니 7개월에서 1년 걸린다는 말도 있었어요. 그래서 가족들이 먼저 결심을 한 겁니다.”

―천안함 침몰 소식은 언제 처음 들었습니까.

“뉴스가 나오는데 설마 했어요. 2함대사보다 백령도로 바로 가보려고 했어요. 부모 마음은 사실이라고 해도 믿고 싶지도 않고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확인이 안 될 것 같아서….”

―나 일병과 마지막 연락은 언제 했습니까.

“지난번 설에 6박 7일 휴가를 나왔어요. 그때 보고 통화는 자주 못했어요.”

―군 생활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처음엔 힘들다고 했는데 함장과 장교들이 굉장히 잘해 줬다고 합디다. 함장도 처음에는 걸리면 바로 때려죽이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보니 결국 그분도 큰 죄인 아닙니까. 저희보다 가슴이 아프겠죠. 평생 마음의 짐을 덜지 못할 겁니다. 일부 가족들이 거부감이 있어서 보지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한 번 뵙고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요.”

―입대할 때 아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줬습니까.

“진해에 신병교육 들어갈 때 따라갔는데 참 자랑스러웠어요. 어차피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 하지 않습니까? 편한 데 갈 수도 있겠지만 군대에서 고생 안 하면 사회에서 힘듭니다. 사회에 나오면 사는 것 자체가 전쟁 아닙니까. 그래서 네가 원하는 데로 가라고 했죠. 해군 제복이 굉장히 멋있다는 말도 하더니 입대 얼마 전에 ‘저, 해군 들어갑니다’라고 하더군요.”

―다른 분들에 비해선 아드님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처럼 괴롭죠. 자식 잃고 괴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아이들 건지려고 남들 앞에 나서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무슨 일을 하다 보면 슬픔이나 고통은 잠시 접을 수 있잖아요. 말이 그렇지 3m의 파도가 치는 데서 구조대랑 같이 보트 타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슬픔에 잠겨 있느니 아예 해상으로 가서 ‘너는 네 새끼 밑에다 남겨놓고 뭐하고 있느냐’ 그런 마음으로 다녔습니다.”

―구조작업을 지켜볼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처음에 구조용 고무보트(RIB)를 탔을 때엔 왜 줄을 하나만 내리느냐, 서너 개씩 한꺼번에 내리면 되지 않느냐고 했어요. 감압 체임버는 세 개인데 하나밖에 쓸 수 없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죠.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거 따지는 것보다 앞으로 근무할 장병들을 위해서 예산 더 받아내서 조금이나마 더 사는 게 낫지, 살려내라 떠드는 시기는 지난 것 같습니다. 어차피 군대에 보냈으면 나라의 아들 아닙니까.”

―벌써 3주가 지났는데 여러 가족들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119구급차에 실려 간 사람이 많습니다. 시신이 안 나온 분들은 술을 드려도 마다합니다. 행여나 술 먹고 떨어져 자다가 나오면 어떡하느냐 해서죠.”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위로를 해준다고 해서 위로가 되겠습니까. 집에 가시라고 해도 안 가고 있는 게, 여기가 아마 제일 편해서일 겁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거죠. 장례가 다 끝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서야 자식의 빈 공간을 느낄 거 같아요. 그때는 저도 힘들 거 같습니다. 가족들이 지금은 아이들이 안치소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해요.”

―장례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여덟분의 사병 가족의 동의를 받아서 절차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김태석 상사와 남기훈 상사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하죠. 일찍 시신이 귀환했잖아요. 그분 가족들은 ‘왜 우리 새끼 추운데 놔 두냐’고 하시는데 장례를 함께 치르려고 부모님들이 배려해 주셔서 진짜 고맙죠.”

―남은 여덟분의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귀환된 자식들 가족들은 돌아와서 미안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38인 귀환자 일동’ 명의로 8인의 장병들 귀환을 소망한다고 현수막도 내걸었어요. 자기 자식은 돌아왔으니까 안도감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가끔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약주도 한잔하시는데 애도 기간에 좀 웃고 그러는 건 삼가달라는 뜻에서 했죠.”

―장례 준비하는 데 이것만은 꼭 해줬으면 하는 건 없는지요.

“서울광장에, 국회의사당에 (분향소 차리자는) 별 낭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실무진은 장례의 ‘장’자도 꺼내기 어렵습니다. 해군의 아들들에게 제일 큰 게 해군장 아닙니까.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되고 아이들에게 군인답게 해줘야죠. 우리가 움직이면 차량만 100여 대가 될 텐데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서울광장도 서울시장님이 자리를 제공해 준다 해도 우리는 사양해야죠. 해군의 조언을 흔쾌히 따르려고 합니다. 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영웅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평택=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 동영상 = 46인의 희생 수병들, 우리가슴에 귀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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