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戒愼’ 끝없는 자기성찰… ‘欲保東洋’ 동양평화 큰 뜻 펼쳐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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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묵으로 본 安의사 삶과 사상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뤼순 감옥에 압송된 그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 뒤 순국하던 3월 26일까지 40일간 죽음을 앞둔 시기를 글씨로 초극(超克)하듯 200여 점의 유묵을 남긴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은 50여 점. 안 의사의 유묵은 수양, 독립, 동양평화, 종교관, 문학 등에 이르기까지 담긴 내용도 다양하다. 그의 생애 전부를 글씨 속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유묵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봤다.》

[1] 孤莫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외로움은 스스로를 믿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중국 진나라 말엽의 병법가 황석공의 ‘소서(素書)’에 나오는 말로,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으면 상대와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해 외로워진다는 뜻. 안 의사는 1908년 장지연 선생 등이 주필로 있던 ‘해조신문’에 ‘인심결합론’이란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나라가 화합의 부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음을 지적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단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유묵은 그 글에서 드러난 안 의사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2]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부도)=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간다.

큰 뜻을 이루려는 이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소홀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글귀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등과 함께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한 유묵이다. 안 의사는 어린시절부터 사서삼경 유교경전과 통감, 조선사와 만국역사 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활쏘기, 말타기 등을 즐기며 무예를 함께 익혔다. 18세가 되던 해부터는 천주교 세례를 받으며 프랑스어와 신사조를 함께 익혔다. 이런 배움과 수련의 과정은 그의 사상과 철학을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3] 天與不受 反受其殃耳(천여불수 반수기앙이)=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

‘사기’ 등에 실려 있는 구절. 하늘의 뜻을 거부하는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를 사살한다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이자 하얼빈 의거의 철학적 배경을 담고 있다.

구국의 방도를 찾으며 교회,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던 안 의사는 20대 후반 연해주에서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공판 중 일관되게 “독립전쟁 중 한국 침략의 괴수를 처단 응징한 것”이라며 자신의 의거가 개인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저격한 독립전쟁의 일환임을 강조했다.

[4]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 追悔何及(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동양을 보전하려면 먼저 정략부터 고쳐야 한다. 때가 지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옥중에서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하며 답답한 심정을 읊은 칠언절구 자작시. 평화로운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개탄,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한 일본에 대한 질책을 담고 있다. 그는 옥중에서 자서전 집필과 함께 ‘동양평화론’을 썼지만 미완으로 남겼다.

[5]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인인 살신성인)=지사와 어진 사람은 자기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

‘논어’ 위령공 편에서 따온 글. 공자는 “지사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仁)을 해침이 없고,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경우는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안 의사의 사상을 핵심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유묵으로, 여기서의 ‘인(仁)’은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뜻한다. 신념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6] 天堂之福 永遠之樂(천당지복 영원지락)=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은 듯한 글. 안 의사는 ‘토마스’란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 현세에서의 생명은 마감하겠지만 천당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릴 것이란 소망을 내비친 이 유묵처럼 안 의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 재판장에게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별은 없느냐”라고 말하며 항소조차 하지 않았다. 유언을 묻는 검찰관에게 “나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순국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부인과 자손들  안중근의사기념관 발행 도록에 실려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부인 김아려 
여사, 손자 웅호, 아들 준생, 손녀 선호, 연호, 며느리 정옥녀 여사. 사진 제공 안중근의사숭모회
부인과 자손들 안중근의사기념관 발행 도록에 실려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부인 김아려 여사, 손자 웅호, 아들 준생, 손녀 선호, 연호, 며느리 정옥녀 여사. 사진 제공 안중근의사숭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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