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치료 꺼리는 사회

  • 입력 2009년 10월 6일 13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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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부대에서 군 복무 중인 이 모씨(24)는 평소 2층인 자신의 집이 무너져내릴까봐 휴가를 나오면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신문에서 납치 기사를 읽은 날이면 행여나 자신의 여자친구도 납치되진 않을까 하루 종일 전전긍긍해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이 같은 증상에 시달렸지만 가족들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정신병원 치료'를 선뜻 권하지 못했다. 여자친구의 오랜 설득과 격려 끝에 10여 년만인 올해 초 찾은 정신병원에서 이 씨는 우울증에서 비롯된 불안증과 강박증세가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이번 조사 결과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담이나 도움을 받은 비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 중 68.9%는 주변으로부터 도움이나 상담을 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 상담을 받더라도 대부분(80%) 가족이나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고 병원을 찾아간 경우는 가장 낮게 나타났다. 술에 유독 관대한 한국 문화 특성을 반영하듯 알코올 의존으로 진단되는 사람들의 94.2%는 단 한번도 주변에 도움이나 상담을 요청해 본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우울증 성향자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주변의 상담이나 도움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 31.5%였다. 이 중 49.3%는 친구에게, 25%는 가족이나 친지에게만 털어놓는다고 했다. 정신과 전문의나 병원 등 전문적인 상담을 받는 사람은 6.8% 수준에 불과한 것. 이는 '우울증 환자 중 33.2%만이 정신의료서비스를 이용한다'는 2006년 보건복지부 조사와도 일치한다.

평범한 가장이자 국내 대기업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과장인 김광수 씨(가명·40)도 최근 스트레스에 따른 불안감과 우울증 증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다. 오랜 고민 끝에 뒤늦게 위기상담전화인 '블루터치 핫라인(1577-0199)'를 이용해 고민을 토로한 결과다. 그는 "언제부턴가 극심한 피로감과 일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고 조금만 몸이 아파도 혹시 중병이 든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며 "그대로 방치하면 순간 욱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자살까지 할 수 있다는 경고에 반드시 전문의 상담을 꾸준히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응답자 중 90% 이상이 스트레스나 우울증, 알코올 의존 등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한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실제 병원 치료는 꺼리는 데에는 여전히 이 문제를 개인의 심리적인 자질 부족으로 여기는 문화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기존 편견과 오해도 하나의 원인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이명수 서울시정신보건센터장은 "꼭 병원이 아니더라도 블루터치 상담전화나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지역정신보건관련 기관 등 무료로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이 많다"며 "우울증 환자의 58%가 30대 이전에 발병하는 등 평균적으로 20대에 우울증 발병이 최고점에 이르기 때문에 20세 성인이 되면 우울증에 대한 사전 검진을 반드시 받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현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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