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서 수십억 털었는데 “도둑든 적 없다”

  • 입력 2009년 10월 1일 05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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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훔쳤어요."(도둑)

"아, 도둑맞은 일 없다니까요."(피해자)

서울·경기 지역에서 230㎡(약 70평) 이상의 고급아파트와 빌라만 골라 수십 억대의 금품을 훔친 대도(大盜)들이 경찰에 붙잡혔지만 피해자들이 도난사실을 숨기고 있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모 씨(40)와 일당은 지난해 9월부터 7개월 동안 서울 강남 일대의 고급아파트 등 52곳을 털었다. 확인된 피해금액만 32억 7000만 원에 달했지만 경찰은 실제 피해금액이 100억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피해자들이 도난 사실을 부인하거나 피해액을 줄여 진술했기 때문이다.

"저기 저 집하고 그 위층 집은 분명히 털었고요, 저 집도 털었는지 긴가민가하네요." 현장조사에 동행한 김 씨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한 고급아파트 단지에서 자신이 도둑질했던 곳들을 가리켰다.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에 명품 시계도 여러개 있었죠." 김 씨는 이 아파트 단지에서만 여러 집을 털어 고가의 보석과 현금 등 금품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피해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팀 김 반장은 피의자가 가리킨 곳을 찾아갔다.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얼마 전에 도둑 맞으셨죠?" 하지만 집 주인은 정색을 하고 그런 사실이 없다고 우겼다. 절도 피의자가 이 집을 털었다고 진술했다고 몇 번을 설명해도 "얼마 전에 이사를 와서 잘 모르겠다"거나 "다른 집이 털렸나보다"라는 엉뚱한 대답만 돌아왔다.

'대도' 김 씨는 광진구 광장동의 이 아파트 단지를 '보물 창고'로 불렀다. 오래된 아파트라 쉽게 벽을 타고 빈 집에 침입할 수 있는 데다 부유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다. 이 아파트 경비원도 절도 사실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한 단지 안에서만 대여섯 집이 털리는 바람에 관리소장이 노발대발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아파트 단지 곳곳에 폐쇄회로(CC)TV도 새로 설치했다. 하지만 이 아파트 단지에서 도둑을 맞았다고 경찰에 신고한 집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 아파트뿐만 아니라 피해가 확인된 52 가구 대부분이 도난 신고를 하지 않았다. 경찰이 집마다 찾아가 절도 사실을 묻자 그제야 도둑을 맞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마저도 피해액수를 터무니없이 줄여 진술하기도 했다. 김 씨 등 피의자가 8억 원 어치를 훔쳤다는데 피해자는 1억 원 어치를 도난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20년 전에 이태리에서 6000만 원에 구입한 건데, 이태리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이 디자인하고 세공한 겁니다. 가격을 따지기도 애매하니 다른 보석하고 다 합쳐서 대충 1억 원으로 합시다." 시간이 지나 가치가 더 오른 희귀한 보석도 20, 30년 전 가격을 그대로 따져 계산했다. 내내 진술을 거부하다 경찰이 끈질기게 피해사실을 추궁하자 마지못해 가정부가 나와 대충 피해사실을 둘러대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은 "소매치기나 소액 절도 사건을 조사하다보면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피해금액을 늘려 말하기 바쁜데 이번 사건은 완전히 반대의 경우"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이미 잃어버린 금품을 돌려받기도 어려운데다 경찰 조사가 들어오면 금품 출처 등에 대해 조사할까봐 쉬쉬하는 것 같다는 게 경찰의 해이다.

"탈세나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법적인 문제는 이미 시효가 지났지만 피해자 대부분이 교수 변호사 의사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인데 나중에 정치라도 할 때 이 보석은 무슨 돈으로 산건지 따질까 겁나지 않겠습니까." 김 반장의 넋두리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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