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로 촌지가 도착했습니다

  • 입력 2009년 9월 2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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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상품권, 음성 거래 악용 우려

'모바일 상품권이 도착했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 A초등학교 교사 H 씨(29·여) 휴대전화로 수업 중 문자메시지가 날아 왔다. 평소 친구들과 기프티콘을 자주 주고받는 H 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수업을 계속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 같은 먹을거리로 바꿀 수 있는 '작은 선물'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 엄마예요” 20만원 상품권 전송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확인해 보니 발신자 이름을 보니 낯설었다. 누가 보냈을까 궁금해하며 휴대전화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확인하니 일반 모바일 상품권이 아닌 선불카드 20만 원권이었다. H 씨는 처음에 누군가 잘못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발신자에게 전화를 걸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엄마예요. 추석인데 변변한 선물도 못 해드릴 것 같아서 보냈어요. 필요한 화장품 사서 쓰세요." H 씨는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촌지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H 씨는 "나중에 대학 동기들과 얘기를 하다보니 이런 방식으로 선물을 받은 친구들이 꽤 있었다"며 "차 한 잔 정도 마시는 수준이라면 성의로 볼 수도 있지만 금액이 너무 커서 부담"이라고 말했다.

선물(Gift)과 이모티콘(Emoticon)을 합친 '기프티콘'은 엄밀하게 말하면 SK텔레콤의 상품명. SK텔레콤이 내놓은 모바일 상품권은 원래 제품과 일대일로 교환하는 방식이었지만 최근 삼성카드에서 모바일 선불카드 제품을 내놓으면서 제휴업체 체인점이면 어디서나 현금처럼 쓸 수 있게 됐다. 한번에 선물할 수 있는 금액도 50만 원으로 올랐다. 저가 제품이 주를 이루던 일반 기프티콘과 달리 이 선불카드로는 화장품, 온라인 쇼핑몰 상품권 등 비교적 비싼 제품도 선물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2006년 처음 시작한 모바일 상품권 서비스가 최근 촌지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일부 학부모들이 이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가장 큰 이유는 전달이 쉽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촌지를 보내려면 직접 찾아가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 선물을 보내야 하지만 이 카드는 상대 휴대전화 번호만 알면 보낼 수 있다. '전달'도 확실하다. 택배로 배달한 선물은 교사가 되돌려 보낼 수도 있지만 이 카드는 교사가 무심결에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저장된다. H 씨는 "문자 메시지 확인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인터넷에 연결돼 내려받기가 시작됐다"며 "다시 돌려주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고민"이라고 말했다.

● 돌려 줄 방법도 마땅치 않아

카드를 보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비밀 보장도 가능하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카드를 보낸 사람은 자기가 누구에게 보냈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누가 몇 명으로부터 얼마를 받았는지는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교육당국에서 단속에 나서도 학부모 계정 전체를 뒤져 의심사례를 일일이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적발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권한도 없다.

그렇다고 교사들에게 일일이 수신 사실을 물을 수도 없다. 교원단체의 반발이 뻔하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올 7월 '촌지보상금제'를 도입해 촌지 수수를 신고 받으려다 교원단체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무산됐다. 당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교원단체는 "청렴한 대다수 교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처사"라고 주장했다.

김동석 한국교총 대변인은 "학부모들이 교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원하지도 않은 촌지가 들어와 선의의 피해자가 양산될 우려가 매우 크다"며 "교직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자정 움직임을 벌이고 있는 만큼 학부모들도 모바일 상품권을 비롯한 촌지 전달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선불카드가 음성거래에 악용될 소지가 있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한번에 이용 가능한 금액에 제한이 있어도 여러 차례로 나누면 대량 송금이 가능하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거래에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프티콘(gifticon):

선물(gift)과 이모티콘(emoticon)을 합친 말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선물을 전송하거나 판매하는 바코드 형태 온라인 쿠폰이다. 제휴 업체에 이 바코드를 보이면 상대가 선물한 제품과 교환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기프티콘’은 SK텔레콤 상품명이지만 기사에서는 ‘모바일 상품권’을 뜻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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