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작은 국숫집서 퍼져나간 ‘밥퍼 바이러스’

  • 입력 2009년 6월 9일 02시 54분


매주 토요일 어려운 이웃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있는 현진이 씨가 6일 오전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밥을 지으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동영 기자
매주 토요일 어려운 이웃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있는 현진이 씨가 6일 오전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밥을 지으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동영 기자
국숫집 운영 오형섭씨 부부 토요일엔 공원서 식사 대접

단골손님들 하나둘씩 동참… 남녀노소 모여 ‘웃음꽃 봉사’

6일 오전 10시 반 오형섭(50), 현진이 씨(51·여) 부부가 운영하는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의 조그마한 국숫집 ‘팔복에서 국수 먹는 날’은 메뉴판에도 없는 제육볶음과 된장국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주부 정창경 씨(48)는 주방에 들어가 고기를 볶았고 간호사 안지영 씨(29) 자매는 야채를 써는 등 9명의 봉사자가 100인분의 점심밥을 만들고 있었다.

국숫집에서 제육볶음 점심을 만든 이유는 주변의 노숙인과 장애인, 홀몸노인 등 따뜻한 밥 한 끼 먹기 힘든 이웃에게 토요일 하루만큼은 가족이 해준 것 같은 점심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1시간 만에 만들어진 100인분의 음식은 인근의 알미공원으로 옮겨졌다.

쌀을 씻고 밥을 지어 공원까지 옮긴 최준국 씨(44)의 다섯 살 난 딸 경아 양은 줄을 선 사람들에게 야외용 방석을 나눠주는 일을 맡았다. 안지영 씨는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과 반찬을 떠줬다. 건설기술연구원 이태원 박사(49)는 식사 후 식판을 거둬 잔반을 모으고 차곡차곡 쌓았다. 다섯 살 꼬마에서 칠순 노인에 이르는 봉사자들의 정성이 모인 덕분에 어려운 이웃 100여 명의 따뜻한 점심식사는 1시간 만에 마무리됐다.

39.6m²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현진이 씨 부부가 매주 토요일마다 이 같은 한 끼 봉사를 시작한 것은 2007년 1월이다. 사업에 실패해 난방도 하지 못하고 겨울을 지내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때다.

현 씨는 “그때 몸과 마음이 정말 추웠는데 그럴수록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 씨 부부는 따뜻한 국수를 만들어 팔 계획을 세웠다. 처음엔 돈이 있으면 적당히 값을 치르고 돈이 없는 사람은 그냥 가도 되는 국숫집을 계획했다.

하지만 건물주들은 그런 방식의 식당에 대해 ‘혐오 시설’이라며 모두 임대를 거부했다. 결국 지금처럼 평소에는 국수를 만들어 팔고 주말에는 수익금과 봉사자들의 힘을 모아 밥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했다.

국수를 먹으러 왔던 손님들이 현 씨의 뜻을 알고 하나둘 일손을 거들겠다며 봉사자로 나섰고 일부는 몇만 원의 돈을 보내오기도 했다. 손수레를 끌며 떡볶이를 팔고 있는 현 씨의 어머니 김정숙 씨(71)도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딸의 식당을 찾아와 주방에서 일손을 돕고 있다.

현 씨가 만든 점심밥을 먹었던 한 노인은 “정부가 매달 주는 쌀 20kg은 혼자 먹기에 너무 많다”며 쌀을 모아 보내오기도 했다. 고양시종합자원봉사센터에서도 어려운 이웃에게 봉사나 후원을 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현 씨와 연결해줬다.

국숫집을 운영해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점심 봉사에 쓰기 때문에 현 씨 가족의 생활은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자녀들도 잘 따라 준다는 게 현 씨의 설명이다.

“아들딸에게 사준 신발과 옷의 종류, 개수를 정확히 기억하죠. 몇 개 되지 않으니까…. 그래도 우리가 아낀 만큼 더 많은 이웃들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을 아이들이 이해하고 잘 따라 주니까 생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행복해요. 가게가 잘되고 돈이 모이면 어느 곳으로든 달려갈 수 있는 ‘밥차’를 마련하는 게 꿈이에요.”

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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