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한의학, 허약해졌나

  • 입력 2009년 3월 19일 21시 42분


"한인 대상 한의원은 경쟁이 더 치열합니다. 백인, 히스패닉 시장을 정면 돌파 해야죠"

14일 오후 6시 반, 미국 진출 경험이 있는 한 한의사가 대한한의사협회 대강당에 모인 한의사들에게 '해외진출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 시간인데도 강당은 130여 명의 한의사로 가득 찼다. 청바지에 배낭을 맨 신세대 한의사나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 한의사 모두 자료집에 밑줄치고 꼼꼼히 메모하며 강의에 집중했다.

한의사들이 한국 땅을 떠나 해외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떠나게 하고 있는 걸까?

최혁용 함소아한의원네트워크 대표원장의 답은 단순 명쾌하다.

"안정됐지만 포화된 명동 땅을 사느냐 불안정하지만 가능성 많은 개발 예정지 땅을 사느냐의 차이와 비슷한 거죠."

○한방병원 진료비 첫 뒷걸음질

한방병원, 한의원은 수년 째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2004년 이후 환자수가 점점 줄더니 급기야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한방병원의 진료비 실적이 뒷걸음질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한방병원 건강보험 진료비는 2007년 1044억원에서 2008년 1024억원으로 1.9% 떨어졌다.

종합병원, 병원을 포함한 모든 진료기관 중 유일한 마이너스 실적이다.

어렵기는 한의원도 마찬가지다.

한의사협회에 따르면 서울 한의원 10곳 중 3,4곳의 월수입은 1000만원에 못 미친다. 직원 월급과 각종 비용으로 매달 700만~800만원이 들어가는 것을 감안하면 개원할 때 빌린 원금은 커녕 이자도 갚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은 셈이다.

○"국민적 신뢰 잃은 것이 주요 원인"

한방 의료 시장은 국민소득의 증대와 함께 80년 대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주머니가 가벼울 때는 아파도 참거나 꼭 필요한 치료만 받는다. 하지만 먹고 살만해지면 보약으로 건강을 챙기려는 수요가 는다. 이에 따라 90년 대 한방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던 기세가 2003년을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대한한방병원협회에 따르면 28개 주요 한방병원의 외래환자는 2003년 199만3911명에서 2007년 182만185명으로 줄었다.

한의계는 경기침체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신뢰를 잃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종수 경희의료원 한방재활의학과 교수는 "한방은 시대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근거중심의학(EBM)'이 대세인데 한의계 내부에선 여전히 '이미 입증된 것인데 무슨 검증이 또 필요한가'라고 말한다"며 "우리가 좋다고 해도 다른 이가 인정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약재에 대한 불신도 한몫했다. 중금속에 오염된 수입산 농산물이 한약재로 둔갑해 한약에 섞여들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한약 시장을 대체했다.

○근거중심의학 노하우 쌓아야

정부와 한의계는 수백년 간 한의학이 쌓아온 노하우를 현대 의학에 접목해 보자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제도적 뒷받침은 부족한 실정이다. 한의학의 안정성, 효율성을 증명하려면 임상시험이 필요한데 한의대 내 임상시험 교육은 실시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연구개발과제도 한약재를 이용한 신약 개발보다는 쉽고 빠르게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건강식품 개발에 맞춰져 있다.

이종수 교수는 "한의계가 양의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을 먼저 선정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도록 근거와 데이터를 마련해야 한의가 잃은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지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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