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40년 눈물 닦아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3월 13일 02시 58분



1969년 KAL기 납북때 억류 황원 前MBC PD 아들 황인철씨

‘부친, 86년당시 대남방송서 활동’ 소식 최근에 들어

“日정부는 다구치 납북문제 공식 제기하는데…” 착잡


“김현희 씨를 만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아들 고이치로(耕一郞) 씨가 한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면 저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KAL기 납북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정부는 외면해왔습니다. 공식적으로 북한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본 정부가 부러울 뿐입니다.”

12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 KAL기납치피해자가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황인철 씨(42).

오랜 세월 동안 황 씨와 그의 가족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한으로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워야 했다. 아버지가 친척 동생과 황 씨를 끌어안고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만이 아버지와 함께했음을 어렴풋이 기억나게 할 뿐이었다.

1969년 12월 11일 낮 12시 25분.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을 태우고 강릉을 떠나 서울로 오던 비행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고정간첩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 납치됐다. 황 씨의 아버지인 강릉 MBC(당시 영동MBC) PD 황원 씨(당시 32세)도 이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사건 발생 66일 만에 승객 39명(간첩 1명 제외)은 귀환했지만 승무원 4명 전원과 승객 7명은 북한에 잡혀 있게 됐다. 그 후 승무원 4명은 모두 북한에 살아 있는 것이 확인됐지만 황원 씨 등 승객 7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귀환한 승객들은 “북한에서 사상교육을 받을 때 황 씨가 북한 교육원들을 이론적으로 논박하고 가곡 ‘가고파’를 선창했다가 교육원들에게 협박을 받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40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유년 시절, 황 씨는 아버지의 납북 사실조차 몰랐다.

“미국에 출장 갔다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고…. 그저 어떻게 된 건가 싶었죠.”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작은아버지로부터 아버지가 납북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면서 간첩의 아들이라고 놀림도 당했다. “그땐 워낙 반공교육이 투철했던 시대라 납북이라고 해도 월북으로 받아들였죠.”

이후 황 씨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야만 했다.

“아들마저 잡아갈라…”

충격 받은 어머니 수년째 병원 생활


“누군가와 얘기할 때 아버지에 대해서 피치 못하게 거짓말을 해야 했죠.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제가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시엔 연좌제가 심했는데 오해 받아 연좌제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하고 싶은 걸 포기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황 씨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순간에 사라지신 데다 자식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았고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됐죠. 저도 차라리 고아원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며 살았어요.”

어머니에겐 극도의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저를 찾아와 불쑥불쑥 ‘누군가 너를 잡아가려고 한다’며 끌고 가기도 했어요. 또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으니 너는 커서 신부가 돼라’고 하셨죠. 빚도 늘어나 빚쟁이를 피해 1년에 몇 번씩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결국 황 씨의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돼 수년째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황 씨는 성인이 되고 난 뒤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2003년 아버지의 이름을 따 ‘원 북스’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황 씨는 최근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1992년 자수한 간첩 오길남 씨(67)에게서 “아버지가 1986년 당시 대남방송인 ‘구국의 소리’에서 방송인으로 일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황 씨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지만 가슴 한쪽은 무겁기만 하다.

“살아계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언론인으로서 지녔던 성향, 사상, 꿈, 처자식, 부모까지 다 잃었는데 과연 행복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현재 황 씨는 아버지의 생사 확인과 송환 촉구를 위해 KAL기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1970년 국제기자연맹(IFJ)과 국제언론인협회(IPI)에 납북자들의 송환을 요청했던 한국기자협회가 다시 한 번 아버지와 같은 납북자들의 송환을 촉구해주길 요청할 계획이다.

“생사 여부를 알려주세요. 이게 저의 소원입니다. 송환 문제를 이념과 정치로 왜곡하지 말고 가족의 아픔을 통해서 바라봐주십시오. 제발 도와주세요.”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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