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값 너무 올라 베트남댁 힘들어요”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 외국인 며느리 ‘설 장보기’ 1년 전과 지금

“한과 구입 반으로 줄고 굴비는 꿈도 못 꿔요

제수비용 작년과 같은데 종류-양 크게 줄어

재래시장 불황에 예전만큼 많이 안 깎아줘”

《“한국 달걀 값 비싼 거 외국인 며느리도 다 알아요.” 심한 불황 여파로 차례상을 마련하기 위한 장보기가 두려운 것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주부들뿐만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지 2년째. 거의 매일처럼 재래시장을 찾아다닌 덕분에 가격 흥정에 관한 한 어지간한 ‘한국 아줌마’를 능가한다고 자처하는 응우옌티란(24) 씨에게도 마찬가지다.》

본보는 19일 오후 응우옌티란 씨와 부틸리우(30) 씨의 장보기에 동행해서 경기 구리시 수택동 구리종합시장을 찾았다. 부틸리우 씨는 한국에 시집온 지 1년이 채 안 된 ‘초보 며느리’다.

○ ‘개당 2000원’ 사과 들었다 놓았다

이들이 맨 먼저 들른 곳은 견과류 가게.

“밤 1kg에 3000원. 큰 놈은 5000원. 제사 지내려면 큰 놈 가져가!”(주인)

“아니에요. 무조건 비싸고 크다고 좋은 거 아니에요. 쥐었을 때 무겁고 꽉 찬 느낌이 좋은 ‘놈’이에요.”(응우옌티란 씨)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근데 우리나라 사람 맞아?”(주인)

응우옌티란 씨와 과일가게 주인과의 흥정은 한동안 계속됐다.

응우옌티란 씨는 능숙한 한국어로 “깎아주세요” “서비스 좀 더 얹어주세요”를 연발했지만 과일가게 주인은 에누리를 해줄 기세가 아니었다.

요즘 같은 불황에는 제값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의가 그의 얼굴에서 엿보였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흥정은 밤 2개 얹어 주는 것으로 끝났다.

밤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서는 응우옌티란 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깎아줬는데…”라며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견과류 가게에 이어 이들이 들른 곳은 청과물 가게.

이들이 ‘개당 2000원’이라고 적힌 가격표를 보며 사과를 들었다 놓았다 하자 이번에는 청과물 가게 주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실제로 물건 사는 손님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이틀 매출 합쳐도 옛날 하루 매상에 못 미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생선 가게는 그냥 지나쳐”

응우옌티란 씨의 올해 설 제수용품 총 예상 구입비용은 지난해와 같은 40만 원. 하지만 차례상에 올라갈 물건의 종류와 양은 크게 줄었다.

식구가 많아 4봉지 정도 샀던 한과는 2봉지로 줄였다. 비싼 굴비는 당연히 생략하기로 했다.

지난해에는 굴비를 5마리나 샀다는 응우옌티란 씨는 “오징어도 3마리에 2000∼3000원 하던 것이 1마리에 2000원 해서 생선가게는 그냥 지나친다”고 말했다.

1시간 가까이 시장을 돌며 이들이 산 물건은 대여섯 가지. 5만 원이 들어 있던 지갑엔 1000원짜리 몇 장만 남았다.

이들은 “진짜 불황은 얼어붙은 우리 마음인 것 같다”면서 “그래도 시장에 오니 마음만은 부자가 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전보다 홀쭉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베트남 며느리’들이 끝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우리 한국 주부 다 돼 있겠죠?”

구리=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강민정(24·이화여대 광고홍보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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