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재두루미… 버들숲… ‘아파트옆 동식물 낙원’

  • 입력 2009년 1월 15일 03시 04분


생태환경 르포… 고양~김포시 철조망 4월부터 철거

큰기러기 1만마리 장관… 흰꼬리수리-솔개 등 희귀종도 발견

삵-족제비-너구리-구렁이 서식… 식물도 160여종 자리잡아

《경기 고양시와 김포시의 한강 하구에 설치됐던 군 철조망이 40년 만에 걷힌다. 사람의 발길이 차단된 이 공간에서 수많은 겨울 철새와 고라니 등은 평화와 우수한 생태 환경을 누려왔다. 동아일보는 육군 백마부대의 허가를 받아 아직 민간 출입이 제한되고 있는 한강 하구 습지를 PGA 습지생태연구소 한동욱 소장과 함께 들어가 봤다. 그동안 엄격히 통제됐던 이곳은 동식물의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영하 10도의 매서운 날씨에 강바람이 더해져 훨씬 추웠던 11일 오전 경기 고양시의 한강 하구 습지.

취재진을 태운 차량이 강변을 따라 서행한 지 1분여 만에 만난 고라니 한 쌍은 철조망 바로 아래에 있었다. 자유로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이 컸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다는 걸 아는 듯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고라니들은 취재차량을 빤히 쳐다볼 뿐 달아나지 않았다.

송곳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수컷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멋진 포즈를 취하는 듯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이 커플은 풀쩍풀쩍 네댓 번 뛰더니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몸을 숨겼다.

교미기여서 멋진 상대를 만나려 애쓰는 고라니들이 쉽게 눈에 띄었으며 윤기가 흐르고 살이 올라 있었다.

국제적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받는 재두루미 서너 마리는 논에서 먹이를 먹다 말고 취재진의 방문에 놀란 듯 고개를 길게 쳐들어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 철조망이 키워낸 숲과 철새

한강 하구 습지는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이중의 철조망이 설치됐고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바람에 각종 동식물이 사람의 간섭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 철조망은 1968년 ‘김신조 침투 사건’ 이후 1970년부터 무장공비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 덕분에 재두루미, 흰꼬리수리, 솔개 등 국제적 멸종위기종을 비롯한 동식물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고양시와 김포시에 일산신도시를 비롯한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어졌고 주민들은 한강 하구 습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철조망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군 당국은 작전을 이유로 철조망 철거에 부정적이었으나 이를 대체할 첨단 경계장비 설치비용을 고양시와 김포시가 지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난해 12월 17일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고양시 구간(행주대교∼일산대교) 12.9km와 김포시 구간(김포대교∼일산대교) 9.7km에 설치됐던 철조망 철거 공사는 4월 시작된다. 고양시 구간은 한쪽만, 김포시 구간은 모두 철거한다.

○ 고라니와 두루미 등의 천국

이곳은 재두루미와 큰기러기 등 겨울 철새들의 천국이었다.

재두루미는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는데 현재 100여 마리가 월동 중이다.

큰기러기는 강가에서 수백 마리씩 무리지어 앉아 휴식과 먹이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큰기러기는 이곳에 국내에서 가장 많은 1만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철새들을 포함해 한강 하구에 사는 조류는 70여 종인 것으로 파악됐다.

호랑이 곰 등 야생 맹수가 없는 이곳에선 국제적 멸종위기종인 삵이 먹이 사슬의 정점에 올라 있고 족제비, 너구리, 구렁이 등도 서식하고 있다.

식물의 종류는 훨씬 다양하다.

습지의 맹주로 꼽히는 버드나무를 비롯해 며느리밑씻개, 도루박이, 광대싸리, 큰개여뀌, 금강아지풀 등 이름도 고운 식물 160여 종이 자생하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한강 하구 습지에는 동식물이 살기 좋은 천혜의 환경이 조성돼 있지만 장마철에 떠내려 오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점점 늘어나는 외래종 식물이 환경 파괴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고양=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 생태계 보전하려면

탐조시설-산책로-자전거도로 등 조성

전문가 “환경파괴… 엄격한 통제 필요”

경기 김포시는 내년 4월 철책이 완전히 철거되면 한강 하구 습지에 자전거도로와 체육시설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할 계획이다.

고양시에서는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탐조대와 산책로, 자전거 도로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수한 생태환경을 즐기겠다는 명분이 생태계를 파괴할 우려가 높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김귀곤(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는 “개방된 후 철조망 안의 동식물들이 지금처럼 편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며 “우수한 생태환경을 즐기기 위해 만든 시설이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철새와 동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한강 하구 습지에 시설물을 만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떠나는 동식물이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철조망은 이중으로 설치됐는데 고양시는 한쪽만 철거할 예정이나 김포시 구간은 전부를 철거하게 된다. 갈수기에는 고양시에 있던 고라니들이 한강을 쉽게 건너가는 장면이 확인돼 고라니들이 도로로 뛰어들 위험이 제기되고 있다.

밀렵꾼이나 불법 낚시꾼들이 활개 칠 가능성도 있다.

PGA 습지생태연구소 한동욱 소장은 “자유롭게 자란 동식물을 사람으로부터 격리시켰던 철책이 사라지면 양측의 충돌로 사고와 환경 파괴가 우려된다”며 “엄격한 통제와 최소한의 탐조시설만 지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양=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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