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못 갚아 소송에 울고 ‘전단지 알바’ 벌금에 한숨

  • 입력 2009년 1월 6일 03시 02분


불황 속 법정에 비친 서민들 애환

소액재판-즉결심판 건수 급증

5일 오전 서울북부지법 105호 즉결심판 법정. 서울 광진구의 한 노래방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다 경찰의 단속에 걸려 즉심에 넘겨진 K(34) 씨가 판사 앞에 섰다.

K 씨는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다 몇 해 전 적자가 쌓여 문을 닫은 뒤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노래방에 손님을 데려올 때마다 받는 돈은 손님 1인당 3000원.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이렇게 푼푼이 모은 돈으로 얼마 전에는 작은 김밥전문점을 내기 위해 계약까지 마쳤다. 새 출발에 들떠 있는 K 씨는 이날 즉심에서 벌금 5만 원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대학 휴학 중인 L(21) 씨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연극 전단을 나눠주다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붙잡혀 이날 서울서부지법 즉심 법정에 오게 됐다. L 씨는 “극단에서 한 달에 월급 10만 원을 받으며 배우 연습과 공연 홍보를 하고 있다. 벌금 몇만 원만 선고받아도 라면조차 사먹기 힘들어지니 선처해 달라”고 울먹였다. 재판장은 L 씨에게 벌금 3만 원을 선고했다.

최근 즉결심판 법정에는 K, L 씨 같은 사례 외에도 무임승차와 무전취식 등 경제난으로 인한 생계형 법규 위반자가 크게 늘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큰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통계상으로도 2006, 2007년 3600여 건이던 즉심 사건이 지난해에 5033건으로 크게 늘었다.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법원의 즉결심판 법정에는 요즘 서민들의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즉결심판 법정은 형사사건 중 20만 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가 선고되는 가벼운 범죄를 심판하는 곳.

2000만 원 이하의 빚이나 물건 값을 달라며 다투는 민사 소액사건 법정도 비슷한 양상이다.

J(39·여) 씨는 생활비로 진 카드 빚을 갚으려고 2001년 사채업체 3곳에서 1000만 원가량을 빌렸다. 틈틈이 모아 1300만 원가량을 갚았지만 이자가 불어나는 바람에 아직도 남은 빚이 3000만 원에 이른다.

정부가 사채업을 단속할 때마다 업체명과 전화번호가 바뀌어 연락이 끊기기 일쑤여서 이자를 제때 내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채업체는 이자 납부가 지연됐다는 이유로 지난해 말 J 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법정에 선 J 씨는 “돈이 생길 때마다 갚고 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사채업체 측도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채무자들이 사라져버리곤 해 그나마 양심적 채무자인 J 씨 같은 사람들에게 독촉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서민들이 법정에서 호소하는 것은 꼭 돈 문제만은 아니다. 가슴 속에 맺힌 답답함을 다 털어내야 비로소 재판이 끝난다.

청소용역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 100만 원을 받지 못한 L(52·여) 씨. 회사 측을 상대로 소송을 낸 L 씨는 법정에서 “회사가 어려워 좀 기다리려 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아들이 취직도 안돼 내 코가 석 자”라며 구구절절한 인생사를 털어놓았다. 최근 들어 소액사건 법정에는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근로자가 부쩍 늘었다. 물건 값을 갚지 못한 자영업자, 월세가 밀린 노인, 심지어 우유 값을 내지 못해 소송을 당한 사건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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