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서울대 법인화, 이미 한참 늦었다

  • 입력 2008년 8월 21일 02시 50분


‘우물 안 고래.’

얼마 전 이희범 한국무역협회장이 한 말이다. ‘우물 안 개구리’를 비틀어 세계 13위권의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글로벌 마인드가 없는 요즘 우리나라 세태를 꼬집은 말이다. 개구리는 ‘좀스럽다’는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몸집이 작으니 우물 안에서 살 수 있다. 문제는 덩치가 크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우물 밖은 두려워하는 한심한 고래다.

법인화는 ‘우물 안 고래’의 생존책

서울대는 우리나라에선 고래다. 이젠 대해(大海)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우물 안에서만 티격태격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잘살 수 있지 않느냐는 미련과 밖에는 예상치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고래의 꼬리를 잡고 있다.

서울대가 우물 밖으로 나가 성공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물 안에만 있다면 제명에 못 살 확률이 100%다. 선택은 분명하다. 일단 나와야 한다. 그 첫걸음이 법인화다. 며칠 전 이장무 서울대 총장이 자신의 임기 내(2010년 7월)에 법인화를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자 서울대 교수협의회는 곧바로 비판성명을 냈다.

교수협의회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법인화를 추진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대학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재정적 지원을 항구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법률에 명시해야 한다, 서울대 이기주의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기초학문의 위축이 우려된다, 신분과 처우의 변화나 등록금 인상에 대한 교직원과 학생의 걱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부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심의위원회가 국립대학 법인화를 권고한 것이 1987년이다. 이미 20년이 넘었다. 숱한 논의를 통해 정부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졌다. 간섭을 줄이고 권한을 줄 테니 자기책임하에 좋은 대학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모호한 건 오히려 대학 쪽이다. 틈만 나면 대학에 자율을 달라고 외치던 대학들이 대학자율화의 결정판인 대학법인화를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열매는 따먹겠지만 씨앗 뿌리고 거름 주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대학에 대한 지원을 항구적, 안정적으로 보장하라는 요구는 본말전도다. 우리는 고교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4년제 대학이 200개가 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도 사립대가 훨씬 많다. 이런 시대에 국가가 왜 유독 국립대에만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을 해야 하나. 국립대 법인화는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판단 때문에 추진하는 것이다.

서울대 이기주의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서울대만 법인화를 서두르지 말고 다른 국립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서울대는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변해야 한다. 혼자라도 법인화를 해서 국내가 아니라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 함께 망하는 것보다 서울대가 성공모델이 돼 다른 국립대를 자극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

기초학문을 보호하고 구성원의 우려를 해소하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미 2004년 4월에 87개 국립대가 동시에 법인으로 바뀐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이 문제도 법인화를 반대하는 명분은 될 수 없다. 예상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씨름하고 있는 일본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더 머뭇거리면 미래는 없다

법인화가 되면 학과의 개폐도 국가가 아닌 총장이 결정한다. 총장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초학문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게 일본의 교훈이다. 일본 국립대 교직원들도 신분 변동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수용했다. 대학이 살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걱정할 정도의 등록금 인상도 없었다.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것은 대학 경영자의 무능을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경영합리화, 학교기업 설립, 연구용역 수주, 특허권 판매, 기부금 모집 등에 힘을 쏟고 있다.

서울대가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싶다면 법인화는 필요 없다. 그러나 큰물의 고래가 되고 싶다면 빨리 우물의 안온함을 버려야 한다. 우물 밖은 이미 전쟁터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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