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 뒤집어읽기]허생전

  • 입력 2008년 6월 23일 02시 57분


허생전에 나오는 빈 섬의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허생이 만든 이상국 ‘빈 섬’… 하지만 그곳 역시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

유토피아의 운명은 결국 디스토피아?

■ 생각의 시작


“이제야 나의 자그마한 시험을 마쳤도다.”

허생은 도적들을 데리고 ‘빈 섬’으로 가서 이상국 건설을 시험해 본 후, 조선 땅으로 되돌아온다.[국어(하), 허생전]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 한 가지. 빈 섬에 남은 도적들, 아니 이상국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곳 유토피아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적 해피 엔딩을 기대해도 괜찮은 걸까?

■ 뒤집어 보자

허생은 오랫동안 수많은 인간 군상이 만들어 온 인간세계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이상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세계라는 것 자체가 의식 있는 인간과 의식 없는 인간, 의식은 있되 탐욕스러운 인간 등 온갖 다양한 군상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낸 역사적 산물 아닌가. 즉, 집합적인 경험, 집합적인 기억의 산물인 것이다. 아무리 허생이 뛰어나다 한들, 오랫동안 많은 인간이 만들어 낸 역사를 능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소수 엘리트의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크지 않을까.

빈 섬에는 기존 인간 세계가 안고 있는 부조리와 문제점이 없을까. 주민들이 서로 충돌해 싸우거나 심지어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까. 먹을 게 풍족하다 해도 서로 더 가지려 다투는 일은 없을까. 도둑과 강간범은 없을까. 집단 따돌림은 없을까. 글을 아는 사람이 사라져 오히려 더 몽매하고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넘쳐나지는 않을까. 빈 섬에 살게 된 존재가 식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 세계에 있든 빈 섬에 있든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다. 태풍이 불어 농사를 망쳤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뭘 먹고 살아야 할까. 인구가 무한정 늘어나 구조적인 식량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각종 생필품, 특히 공산품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들과 교역하는 상대국이 이 약점을 이용해 턱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허생은 그 사회의 갈등 해결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없다면? 서로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빠져들 수 있다.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빈 섬은 이상향이 아닌 기존 인간세계와 똑같은 공간이 될 것이다.

■ 한 번 뒤집어 보자

허생은 인간과 인간세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빈 섬이라는 이상향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갈 존재들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간과했다. 어차피 불완전한 인간이고, 불완전한 인간세계라면 왜 굳이 섬으로 숨어들어가야 했을까.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불완전한 인간세계에서 그나마 비인간적이고 불완전한 모습들을 개선하고 혁파하기 위해 애쓰는 게 더 타당하고 현실적인 선택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을 잠깐 참고해 보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희망으로 다른 행성을 찾아가는 ‘지구 탈출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그러나 그 ‘꿈’은 다시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반복할 뿐이다. 개인 간의 갈등과 폭력, 이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와 공권력의 억압과 폭력, 그리고 부패,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혹은 지배계층과 지배계층 사이의 권력다툼…. 결국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그렇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유토피아는 없다. 탈출은 문제로부터의 회피이고, 회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질적 방책이 될 수는 없다. 제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해도, 이미 그들은 ‘도망친’ 자들이다. 마땅히 부딪쳐야 할 고통들을 외면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도망쳐버린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도착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없다. 불완전에서 완성을 향해 노력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사회도 늘 불완전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세계를 구성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인간이다. 세계를 바꿔나가는 것도 인간이며, 그 ‘세계’는 저 멀리 떨어진 피안이 아니라 바로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이자 일상이다.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꿈을 실현하고자 인간들이 노력하는 ‘과정’ 자체이다.

조혜윰 청솔아우름 통합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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