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문학 숲 논술 꽃]서사로서의 소설-역사, 그 차이점은?

  • 입력 2008년 4월 21일 02시 54분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은 서사(敍事)를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적음’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사(narrative)는 ‘사건의 서술’이라는 의미에서 소설, 서사시, 희곡, 신화, 전설, 역사 등 언어적 서사물은 물론 영화, 드라마, 연극, 오페라 등 비언어적인 서사물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와 같은 서사물의 공통점은 이야기의 내용(시간적으로 연쇄된 사건들)이 있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 즉 화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event)과 서술하는 행위(narration)는 서사의 성립 요건이지요. 영화나 연극 같은 비언어적인 서사물 역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대사와 연기를 통해 ‘서술’한다는 점에서 서사물임이 분명하지만 서사의 관례적인 용법은 언어 매체에 의존하는 ‘심미적 서사’로 국한됩니다. 흔히 우리가 ‘서사(narrative)’하면 소설을 떠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무수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건은 조잡하고 파편적이어서 도무지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의 하루 일과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에 등교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일상에 특별한 사건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혹은 하루 일과의 모든 사건이 서로 인과적 관계로 완결되어 있습니까? 대개는 어제와 같은 일상의 반복이기 쉽고, 이런 저런 사건이 뒤죽박죽 얽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사는 다르지요. 서사 속의 사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완결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부 실험적인 서사물을 제외하면 서사물 속에서 전체의 줄거리와 무관한 사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령, 김유정의 ‘봄봄’에서 주인공이 장차 장인이 될 봉필과 웃지 못 할 ‘격투’를 벌이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지요. 4년째 데릴사위를 살고 있음에도 혼례를 올려주지 않는 장인에게 불만을 품은 주인공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상을 받다가 점순의 새침한 투정(“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에 자극받아 ‘장인님’과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그날 다툼의 결정적 계기가 된 점순의 핀잔이라는 사건 외에도 이 소설 속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이 다툼과 맞물려 있습니다. 점순과의 혼례를 미루고 ‘나’에게 온갖 얄궂은 일을 시키면서도 손찌검을 일삼는 장인, 장인의 약삭빠른 행태를 성토하는 뭉태와의 대화, 장인과 함께 구장을 찾아가 놓고도 담판을 짓지 못한 일 등 모두 ‘나’와 장인의 다툼이라는 결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사건과 달리 서사 속의 사건에 이와 같은 완결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기억입니다.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 모두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경험 중에 자신에게 유의미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만을 ‘기억’하지요. 다시 김유정의 ‘봄봄’을 통해 살펴봅시다. ‘나’가 4년 동안이나 데릴사위 노릇을 하면서 겪은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소설 속의 사건만은 아닐 겁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건을 겪었겠지요. 하지만 소설 속에는 특징적인 사건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나’의 기억을 통해서 말이죠. 요컨대, 개인의 체험은 기억에 의해 치밀한 완결성을 갖춘 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잡하고 파편적인 경험을 완결된 서사로 바꾸는 ‘기억’은 서사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이 서사의 원리라는 사실은 서사(敍事)의 하위 영역인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 사실에 대한 선택적 기억의 총체로서 완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집단 기억 혹은 공식 기억으로서의 역사는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기제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공식 기억으로서 서술된 역사는 보편성은 있을지라도 그 자체가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과거 사실에 대한 공식 기억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망각된 과거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식 기억에서 누락된 과거의 경험은 그대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私的)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적 기억의 종류로 자서전, 증언, 소설과 같은 서사의 하위 영역을 들 수 있습니다. 사적 기억은 역사라는 공식 기억에 의해 제도적으로 은폐되고 누락된 과거를 복원하고, 진실을 규명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공식 기억이라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사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경우 피해자들의 증언은 일본의 공식 기억에 대한 강력한 반증으로서 진실을 규명하는 힘이 됩니다.

이처럼 서사의 한 종류인 역사와 문학의 접점은 기억입니다. 하지만 장르가 다른 이상 두 서사의 서술 형식에 따른 효과는 다르기 마련이지요. 문학과 역사라는 두 서사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주제로 출제된 2008학년도 숭실대 정시 논술고사의 논제가 성립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6·25전쟁에 대한 공식 기억인 역사교과서와 사적 기억인 소설(김동리의 ‘흥남철수’)을 제시하고 각각의 서사가 갖는 효과를 비교·대조하는 논제였습니다. 서사의 한 양식인 소설의 특성에 대한 기초 개념을 이해한 수험생이라면 논제의 출제 의도와 함의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논술고사를 대비하기 위한 문학작품의 이해는 개별 작품의 내용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형식의 효과와 더불어 유사한 양식과 공통되는 특징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문학작품에 대한 심층적인 학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박진성 ㈜엘림에듀 논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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