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영 박사의 신나는 책읽기]하루에 몇 권?적당한 독서량은?

  • 입력 2008년 3월 11일 02시 54분


빨리빨리 독서왕? 하루 한권 맛을 느끼며 천천히!

공자는 책을 천천히 읽었다. 공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다섯 수레의 책이란 어느 만큼의 분량일까? 1000권쯤 될까, 2000권쯤 될까?

당시 책이 대나무 조각을 엮어서 글을 기록한 죽간(竹簡)인 점을 감안하면 다섯 수레에 가득 채워도 몇 백 권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그 책들을 어찌나 여러 번 읽었던지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서너 번씩 끊어지는 것이 예사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도 책을 여러 번 읽어서 책장이 너덜너덜해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공자는 책을 빨리 읽는 분이 아니고 천천히,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읽는 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몇 백 권 밖에 못 읽었을 텐데도 풍부한 앎과 높은 지혜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제자들에게 ‘행간을 읽으라’고 가르쳤다. 행간을 읽는 것은 바로 책을 정독해 글의 이면에 숨은 뜻까지 캐내는 읽기 방법을 말한다.

○ 책을 너무 빨리 읽는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책을 지나치게 빨리 읽는다. 어린이 도서관에 가 보면 아이들이 책장을 훌훌 넘기면서 보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읽는 건지, 구경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빠르다.

2007년 당시 문화관광부와 출판연구소가 실시한 ‘국민독서 실태조사’를 보아도 최근 3년 사이에 학생들의 독서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속도가 빠른 동영상, 애니메이션, 인터넷 게임 등에 익숙해지면서 책도 점점 빨리 읽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아이들이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진 가장 큰 이유는 양적 독서를 권장해온 우리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책을 많이 읽는 이들에게 ‘독서왕’이란 칭호를 붙여주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아이들은 너도나도 많이 읽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빨리 읽기가 습관이 됐고, 빨리 읽다 보니 대충대충 읽고, 건성건성 읽고, 훑어 읽는 아이가 많아졌다.

그러나 이런 읽기방법은 동화책이나 시집, 교과서 등 어떤 책을 읽는 방법으로도 적당하지 않다. 내용이나 중심 사상, 정서 파악이 어렵고 시간 때우기 독서가 되기 쉽다.

○양적 독서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들

어느 날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엄마 모임에서 전화가 왔다. 일곱 살 난 아이들은 ‘하루에 그림책을 몇 권이나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이가 하루에 몇 권이나 읽고 있나요?”

“하루에 열 권씩 읽히고 있는데, 이웃 C아파트 엄마들은 열두 권씩 읽힌다고 하네요. 어느 쪽이 맞나요?”

그래서 대답했다. “하루에 한 권입니다.”

독서의 기쁨은 천천히 읽을 때 느낄 수 있다 원래 책 읽기는 ‘언어적 추측 게임’이다. 우리 눈이 문자에 닿는 순간 ‘추측’과 ‘확인’이라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이 추측한 대로 될 때에는 희열을 느끼게 되고, 빗나갔을 때는 실망하지만, 곧 다음 장면을 추측하게 되면서 작품 속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빨리 읽거나 건성건성 읽을 때는 ‘추측과 확인’이라는 게임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즐거움이 없는 책 읽기는 마른 나무줄기처럼 맛이 없다.

어느 한 책만 그러면 다행인데 빨리 읽는 것이 습관이 된 아이들은 모든 책을 그렇게 읽는다. 그래서 그 맛없는 독서는 모든 책으로 확산되고, 아이들은 ‘나는 책 읽기가 싫어’라고 말하게 된다.

이 맛없는 독서는 엄마들이 시작한 것이다. 양적으로 승부하려고 빨리, 많이 읽기를 권하는 엄마들의 책임이다.

○ 책은 하루에 한 권만 천천히 읽히자

심지어 빠른 책 읽기, 나아가 속독이 정보화 시대의 효과적인 지식획득의 방법이라며 아이들에게 권장하는 엄마들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짧은 시간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임무는 완수할지 몰라도 책 읽는 즐거움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어릴 때 이런 습관이 생기면 나중에 커서도 책 읽는 것은 일종의 일이 된다.

영화광인 나는 어느 휴일에 평소 미뤄두었던 영화 8편을 빌려다 놓고 본 적이 있다. 그런데 4편을 보고 5편째 보니까 이 영화 내용이 저 영화랑 섞이고, 이 배우와 저 배우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머리까지 어찔어찔해지며 영화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 됐다.

어른도 이럴진대 아이들이 책을 하루에 대여섯 권씩 보아야 한다면 얼마나 큰 곤욕일까? 막 싹트려는 독서에 대한 흥미마저 사라질까 두렵다.

남미영 한국독서교육개발원 원장 mynam@kred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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